(출처-조선일보 2015.12.11 권대열 정치부장)
집권 세력인 새누리당 친박계가 1년 내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영입론을 우려먹더니
이젠 야당까지 공식 참여를 선언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며칠 전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반 총장은 우리 당 출신이고,
우리가 만들어 낸 유엔 사무총장"이라며 "반 총장을 대권 후보로 영입하려는 욕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제1 야당 책임자로서 허언(虛言)을 할 문 대표는 아니다.
반 총장은 지난 2006년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외교보좌관(차관급)과 외교부 장관을 하다가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됐다.
당시 반기문 장관도 노 대통령에게 각별한 애정이 없고는 하기 힘든 말을 많이 했다.
2005년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외교부의 역량이 미치지 못할 때 대통령께서 명쾌한 지침을 주셔서 앞길을 가르쳐주신 데
대해 깊이 감사드린다"고 한 말은 지금까지 회자된다. 문 대표가 '우리 사람'이라고 할 만도 하다.
여야가 반 총장을 '모시려는' 이유에 대해 대부분은 "영입만 하면 대선 승리는 떼놓은 당상일 테니까"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야의 이른바 전략가라고 하는 사람들 얘기는 좀 다르다. "반기문은 대선용이 아니라 총선용"이라는 거다.
여권(與圈)에서 정무 전략을 다뤘던 한 인사는 "과거 선거에선 충청 표심 예측이 어느 정도 가능했는데
내년 총선은 예측 불가"라며 "그런 와중에 어느 한쪽에서 '우리가 반기문 대통령을 만드는 데 앞장서겠다'고 하면
충청 민심은 그 당(黨)을 한 번 더 보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이런 계산에 대해 친노(親盧) 진영의 한 핵심 참모도
"우리도 (여권의 그런 계산을) 안다. 그래서 반 총장을 그냥 여당에 넘겨줄 수는 없는 것"이라고 했다.
2012년 총선 때 새누리당은 100석이 걸린 서울·경기에서 37대63으로 참패했다.
그런데도 152석 과반 의석을 차지할 수 있었던 건 충청권에서 25석 중 12석을 얻었던 덕이 컸다.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이 전국적으로 유례없는 대승을 거뒀던 2008년 총선 때는 충청에서 24석 중 1석밖에 못 얻었다.
충청 표심은 충청 출신 인구 비중이 높은 인천과 경기 남부 선거에도 영향을 미친다.
반기문 영입론을 띄우는 여야의 본심(本心)은 거기에 있다고 본다.
김무성 대표가, 문재인 대표가, 또 다른 대선 주자들과 참모들이 정말로 반 총장을 꽃가마 태워서 대통령 자리로 모시려는
생각을 할까. '우리 기득권을 버리고라도 나라 장래를 위해 국제적 지도자를 대통령으로 만들자?' 그들이 그럴 리 없다.
충청 표를 겨냥해 반 총장을 이용하는 것이란 해석이 훨씬 설득력 있다. 그리고 총선이 끝나면 뒷전으로 버려둘 거다.
반 총장을 아끼거나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혹시라도 정치권의 부추김에 들떠 있다면 생각을 다시 해봐야 한다.
반 총장 스스로도 이런 '희롱 대상'이 되 는 상황으로부터 명확하게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
대리인을 시켜서 "국내 정치와 연결시키는 건 총장직 수행에 도움이 안 된다"는 정도로 애매하게 말하는 건
정치권이 이용할 빌미만 제공할 뿐이다.
임기가 끝나는 내년 10월까지 반 총장이 대임(大任)을 잘 마칠 수 있도록 여야 정치권 스스로 협조해 주면 좋겠지만,
그런 금도(襟度)를 베풀 사람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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