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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동해안 도루묵

바람아님 2015. 12. 21. 00:30
경향신문 2015-12-20

목어에서 은어(銀魚)로 신분상승됐다가 다시 목어로 전락한 ‘환목어(還目魚 혹은 還木魚)’가 있다. 이름하여 ‘도로 목어가 됐다’는 뜻의 도루묵이다. 1613년 무렵 허균은 “목어를 좋아했던 고려왕이 이름을 은어로 고쳤다가 싫증이 나자 다시 목어라 고쳤다”(<성서부부고> ‘도문대작’)고 썼다. 이식(1584~1647)은 ‘환목어’라는 시까지 지었다(<택당집>). 

“왕년에 임금이 난리를 피했는데(國君昔播越)~마침 목어가 수라상에 올라와(目也適登盤) 허기진 배 든든히 채우니(頓頓療晩飢) 은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勅賜銀魚號)”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난리 후 서울로 돌아온 임금이 진수성찬 속에 끼여있던 ‘이 가여운 생선’을 외면했다는 것이다. 이식은 “(그래서) 도로 목어로 삭탈되어(削號還爲目) 순식간에 버린 자식 취급을 받았다(斯須忽如遺)”고 동정어린 시선을 보냈다.

문제의 임금은 임진왜란의 선조나 이괄의 난 혹은 병자호란 때의 인조일 수 있다. ‘고려왕’이란 언급을 본다면 홍건적의 난 때(1361년) 피란한 공민왕일 수도 있겠다. 어찌 됐든 백성을 전란의 화에 빠뜨린 임금 때문에 ‘도루묵’의 오명을 얻었다. 물론 도루묵이 볼품도 맛도 없는 하찮은 생선에 붙이는 ‘돌’과, 눈이 큰 생선에 붙는 ‘목(目)’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그래도 이식은 “씹어보면 담박한 맛이 있어(終然風味淡) 겨울철 술안주로 제격(亦足佐冬시)”이라고 옹호했다. 특히 11~12월 마리당 600~1000개의 알을 품은 도루묵은 톡톡 터지는 알맛과 담백하고 고소한 살맛이 일품이다. 끈적한 알에는 비타민과 피부에 습기를 유지해주고 관절을 이루는 연골 및 활액의 성분이 들어있다. ‘도루묵’의 지위에서 다시 ‘도로은어’의 작위를 받을 만한 수준까지 올라왔다.


한데 또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엄청난 양의 도루묵 알이 동해안 바닷가와 어선의 그물을 새까맣게 뒤덮은 것이다. 복원사업을 한다며 10년째 치어를 방류한 탓이다. 이번에도 사람 때문에 ‘말짱 도루묵’으로 다시 전락할 판이다. 그나마 이식의 시가 도루묵에게 위안이 되려나. “잘나고 못난 것이 자기와 상관있나(賢愚不在己). 명칭은 그저 겉치레일 뿐(名稱是外飾) 버림 받았다 해도 그대 탓은 아니라네(委棄非汝疵).”


<이기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