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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 식민지배의 상징 '로즈' 동상 철거 싸고 찬반 시끌

바람아님 2015. 12. 27. 00:21
동아일보 2015-12-24

영국의 아프리카 식민 지배의 상징 인물인 세실 로즈(1853∼1902)가 사후 110여 년 만에 과거사 논쟁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그는 19세기 후반 대영제국의 식민정책에 앞장서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다이아몬드와 금광 개발 사업을 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았다. 하지만 원주민을 학살하고 고문했으며 토지를 수탈하는 악행도 저질렀다. ‘제국주의 영국’의 세력 확장엔 크게 기여했지만 식민 지배를 당한 사람들에게는 무자비한 침략자였던 것이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우등한 인종이며 우리의 거주 공간이 늘어날수록 인류 전체에 더 좋은 일”이라는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기도 했다.


영국 옥스퍼드대 오리얼 칼리지에 있는 세실 로즈 동상.사진 출처 가디언 홈페이지



로즈를 둘러싼 과거사 논쟁은 요즘 모교인 영국 명문 옥스퍼드대에서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그의 동상이 캠퍼스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로즈가 사후 600만 파운드(현재 가치로는 약 7억 파운드·1조2000억 원)를 모교에 기증했고 학교 측은 감사의 뜻으로 그의 동상을 건립했다. 로즈 동상 철거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옥스퍼드대 재학생 은토코소 콰베 씨는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대표적인 제국주의자였던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옥스퍼드의 포괄적 문화에 어긋난다”고 꼬집었다.

‘부끄러운 선배’의 동상을 학교 안에 세워 두는 것은 수치라는 ‘철거파’와 그냥 두자는 ‘철거 반대파’가 대립하는 가운데 주요 언론들까지 논쟁에 가세했다.

가디언은 22일 자 사설에서 “인종차별의 상징 격인 로즈의 동상이 대학 구내에 버젓이 서 있는 것은 시대정신에 맞지 않는다”며 철거 쪽에 손을 들어줬다. 가디언은 특히 과거를 직시한 독일과 회피로 일관했던 영국의 차이점을 강조하며 제국주의의 유산에 대해서도 성찰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반면 파이낸셜타임스(FT)는 23일 자 사설에서 로즈 동상 철거 운동은 학문적 다양성을 추구하는 대학 성격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철거 반대를 분명히 했다. FT는 “자신들의 생각에 맞지 않는다고 이를 무조건 배제하려는 것은 학생들 스스로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려는 위험한 풍조”라고 비판했다.

논란이 거세지자 당초 동상 철거에 부정적이었던 옥스퍼드대 당국은 공식 토론의 장을 마련하겠다며 한발 물러섰다. 영국 내 다른 대학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불거질 수 있어 이번 옥스퍼드대의 조치는 영국 내 로즈 동상 철거의 시금석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가디언은 분석했다. 4월에는 남아공 케이프타운대 교정에 있던 로즈 동상이 식민 잔재 청산을 이유로 철거됐다.


한편 ‘로즈는 내려와야 한다(RMFO·Rhodes Must Fall in Oxford)’는 동상 철거 운동을 올해 10월부터 주도하고 있는 콰베 씨가 로즈 유산으로 장학금을 받은 ‘로즈 장학생’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온라인에서는 ‘장학금을 반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콰베 씨는 이에 대해 “나는 로즈 장학금의 수혜자가 아니다. 로즈가 약탈한 자원과 노예로 만든 내 동포들 노동의 수혜자일 뿐”이라고 밝혔다. 로즈 장학생 중에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애슈턴 카터 미 국방장관이 포함돼 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