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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위안부 문제, 다시 시작하자/[위안부 문제, 다시 생각하자]에 대한 반론

바람아님 2016. 1. 4. 00:44

[중앙일보] 입력 2016.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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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림/연세대 교수·정치학


광복 70주년, 한일협정 50주년을 맞는 지난해 세밑에 타결된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과 일본 두 정부의 ‘최종 해결’ 선언은 우리를 깊은 인간적 당혹감과 부끄러움으로 몰아넣는다. 이 시대 인간과 세계시민에게 위안부 문제는 국가의 국가됨과 인간의 인간됨을 가장 아프게 묻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장 도덕적이며 가장 보편적인 인권 문제요 인간 문제로서 결코 한·일 간의 민족주의 문제가 아니다. 인류에게 가한 전체주의의 전쟁범죄와 성폭력에 대해 세계가 어떤 자세로 접근할 것인지를 묻는 세계 문제인 것이다. 전체주의의 전쟁범죄가 ‘국가 간의’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 선언으로 종식된다면 법적 시효조차 없는 ‘반(反)인도 범죄’와 ‘반평화 범죄’에 대해 인류는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

가해자가 피해자 윽박지르게 될
초유의 역전 상황이 초래됐다
본질적 인간 윤리문제 제기할
피해자와 세계 시민들을
옹졸한 인간들로 만들어버린
우리가 너무 부끄럽다

 국가 간 공방을 넘어 차분하게 묻자. 그동안 무엇이 규명되고 해결되었는가? 첫째, 진상규명이다. 한·일 두 정부나 국제기구에 의한 공동 진상조사와 보고는 있었는가? 둘째, 국제법적·인도적 전쟁범죄의 공식 인정과 사과가 있었는가? 셋째, 보상과 배상은 있었는가? 넷째, 인류가 함께 기억할 추모시설은 건립하였는가? 다섯째, 재발 방지 약속이 있었는가?

 아직 진상규명조차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당사자도 아닌 제3자가 최종 해결을 말하는 것은 실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특히 관용에 관한 이론들이 말하듯, 피해자가 용서와 화해를 말하기 이전에 가해자가 먼저 그것을 말하는 것은 2차 가해다. 추모를 위한 민간 자율의 장소마저 정부 간 합의를 통해 철거하고 이동할 수 있다는 오만은 2차 가해의 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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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자의 동의 없는 가해자에 의한 종결 선언은 있어선 안 된다. 대통령이 강조한 ‘피해자들과 국민이 납득할 수준’을 말한다. 그러나 합의 이전에 피해자들과의 최소한의 대화조차 없었다. 청와대·정부·관료·여당이 피해자들의 납득을 숙고했다면 이런 일방통행은 없었을 것이다. 경멸은 언제나 자기로부터 시작된다. 스스로를 경멸하기 이전에 인간은 누구로부터도 먼저 경멸당하지 않는다. 특히 국가는 국민을 먼저 경멸받게 해선 결코 안 된다. 대한민국 헌법은 말한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할 의무를 지닌다.” 그러나 국가의 국민 경멸로 인해 이제 갈등의 한 축이 한국사회 내부로 옮겨오는 상황을 맞고 말았다.

 게다가 ‘피해자가 납득하지 않은’ 약속 때문에 이제부터는 ‘가해-피해’ 갈등전선에 더해 약속위반 공방이 더해질 것이다. 이 문제는 당연히 가해국이 더 공세적일 것이다. 민간사회의 국제기구에의 호소와 위안부 인권운동조차 합의 위반이라고 공격받게 될 것이다. 전쟁범죄와 인권에 대한 국제법과 국제합의의 역사에서 가해자가 피해자를 윽박지르게 될 초유의 이 역전 상황은 피해 국가의 동의하에 초래되었다. 니체의 말을 빌리면 이는 “병든 자들이 건강한 자들을 병들게 하는” ‘전도된 세계’다. 그러나 “그렇게 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틀림없이 지구상에서 우리의 최상의 관심사여야 할 것이다.”

 대통령이 말한 ‘시간적 시급성과 현실적 여건’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건국 과정의 반공과 친일의 교환이라는 이중기준은 재연하지 않기를 소망한다. 5·24조치 해제, 금강산관광 재개, 과거사 사과, 세월호 진상규명에 대해 정부는 매우 비타협적이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는 대승적이다. 위안부 ‘인권 문제’를 넘은 한·미·일 ‘군사협력’은 이제 가속화할 것이다. 건국 과정에서 친일을 덮으려 반공을 앞세우고, 반공을 위해 친일을 포용했던 오류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정부는 동일한 전체주의의 산물인 ‘위안부 인권’은 경제 지원으로 무마하고, ‘북한 인권’은 경제 문제가 아니라 체제 문제라는 이분법은 거둬들이기 바란다. 위안부 인권 문제는 한·일 협력을 위해 희생돼야 하나 북한 인권 문제는 남북협력이 필요하더라도 양보해선 안 된다는 이중 기준도 거둬들이기 바란다.

 이번 합의는 대통령이 설정한 최후선인 ‘피해자들과 국민의 납득’이 없었으므로 무효다. 정부는 협상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국회는 국정조사를 실시해야 한다. 그런 연후에 한·일 두 나라는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을 위한 공동 진상조사에 즉각 착수해야 한다.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자.

 세계 양심 인사들이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감사했던 이유는 묻혀 있던 인류의 집단범죄가 그분들의 감연한 자기희생적 용기로 인해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숭고한 결단을 이렇게 봉합해 본질적인 인간윤리 문제를 계속 제기할 피해자들과 세계시민들을 최종적으로 해결된 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옹졸한 인간들로 만들어버린 우리가 너무 부끄럽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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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 다시 생각하자]에 대한 반론

[J플러스] 입력 2016.01.02 


덕담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새해벽두부터 다른 이의 글을 비판하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기로 결심을 한 이유는 중앙일보 중앙시평에 실린 박명림 연세대교수의 [위안부 문제, 다시 시작하자]의 글이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을 야기할 개연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박교수는 최근 한일정부 간 합의한 위안부 문제에 대해 ①진상규명조차 되지 않았고 ②피해자의 동의가 없었고 ③’불가역적’ 합의문구로 인해 민간운동의 발목이 잡혔으며 ④위안부 인권과 북한인권을 이중잣대로 판단하는 모순 때문에, 한일간 합의는 무효라고 주장한다.

박교수가 주장하는 이 4가지 논점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특히 마지막 4번째 주장에 대한 반론을 위해 이 글을 쓰게 되었음을 미리 밝힌다.

첫째 진상규명조차 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한 반론이다. 가해국이 반대하는 상황에서 완벽한 수준의 진상규명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특히 가해국이 범죄를 입증할 대부분의 문서를 소유/보관하고 있는 상황에서 피해국인 한국이 단독으로 진상규명을 할 수도 없거니와 일본의 협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므로 그의 주장은 비현실적이다. 일본은 한마디로 독일과 같은 문명국이 아니다. 그 대가는 일본 스스로 치르게 될 것이다.

둘째, 피해자의 동의가 없었다는 부분이다. 첨예하게 대립되는 외교협상은 보안유지가 생명이다. 그러므로 사전에 피해 당사자들의 동의를 구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설혹 사전에 동의를 구하려 해도 연로하신 그 분들의 통일된 의견을 수렴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

셋째, ‘불가역적’ 합의문구로 인해 민간운동의 발목이 잡혔다는 부분이다. 양국간 합의문은 정부의 행위에 대한 것이지 민간단체의 행위까지 강제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넷째, 위안부 인권과 북한인권 문제의 이중잣대 주장 관련이다. 박교수는 경제협력을 이유로 일본에게는 양보하면서 북한인권문제는 왜 남북협력이 필요함에도 양보를 하지 않느냐고 항변하고 있다.

박교수에게 묻는다. 70여년 전인 1940년 대에 발생한 사건과 2016년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인권유린을 같은 잣대로 비판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시간의 개념보다 더 중요한 것이 보편적 진리인 인권이라면 수백 년 전에 청나라에 의해 자행된 조선여인에 대한 인권유린도 같은 잣대로 비판해야 하지 않은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위안부 문제는 과거사이고 북한인권은 현재진행형이다.

박교수의 시간에 대한 무개념보다 휠씬 더 심각한 문제가 일본과 북한의 인권 문제를 이중잣대라고 주장하는 그의 편향된 시각이다. 일본정권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보상하겠다고 서면으로 약속했다. 그런데 북한정권은 현재 진행 중인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대해 단 한번이라도 인정한 적이 있는가? 이것이 왜 이중잣대인지 박교수는 적극적으로 해명해 주시기 바란다.

진보는 이 시대의 소금과 같은 소중한 존재들이다. ‘효율’이나 ‘시장경쟁’을 주장하는 보수들 보다는 ‘사회정의’나 ‘공정한 분배’를 주장하는 진보가 그들이 지향하는 가치(Value)때문에 자신에 대해 훨씬 더 엄격하고 모범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에게 더 엄격하고 모범적인 것이 말 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많은 진보지식인들은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간통이라는 식의 자기 모순에 빠져 있다. 민주주의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야당이 정작 자신의 당 운영은 매우 독선적으로 하다가 결국 분당(分黨)의 고통을 치르고 있듯이 말이다.

한국은 지금 진보지식인들의 무책임한 비판과 무분별한 선동으로 인해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겪고 있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선악구도’라는 덫에 걸려 악으로 규정되는 개인, 단체, 정권의 경우, 웬만해서는 그 덫에서 빠져 나올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보 지식인들은 자신의 주장이 현실적으로 말이 되는 것인지, 진영의 논리에 빠진 프로파겐다로 오해 받을 소지는 없는 것인지 좀 더 신중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짜고 치는 고스톱의 달인인 기득권층의 특권과 반칙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교수님의 2016년이 밝고 평안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강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