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동서남북] 過去와 대화하느라 現在를 외면한

바람아님 2016. 2. 18. 11:26

(출처-조선닷컴 2016.02.18 신영복 교수  이선민 선임기자)


이선민 선임기자 사진지난달 15일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자 '우리 시대의 스승' 
'한국의 대표 지성' '인문학의 큰 별'이라며 그를 기리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신 교수와 가까웠던 진보좌파 언론이나 지식인은 물론 중도파와 일부 보수우파까지 그에게 호의적이었던 
것은 망자(亡者)에게 너그러운 한국 사회의 관습과 함께 그가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통해 대중에게 
친숙한 인물이었던 점이 작용했다. 또 독재정권에 의해 20년 넘게 투옥됐던 '지사(志士)'라는 소문, 
단아한 선비적 풍모, '더불어체(體)'라고 불린 독특한 서체(書體) 등이 그가 부박한 현대사회에서 보기 
드문 지식인의 표상으로 알려지는 데 일조했다.

그런데 얼마 뒤 진보좌파 신문의 추모 특집에 실린 '신영복, 그는 본디 붉은 경제학자였다'라는 글이 파문을 일으켰다. 
'동양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시서화(詩書畵)에 능한 인문주의자'로 알려졌던 신 교수가 젊은 시절 '마르크스주의를 
내면화한 급진적 지식인'이었고, 이로 말미암은 오랜 옥중 생활은 물론 그 뒤에도 '잘못된 세상에 분노하고 그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혁명적 인간'이었다는 내용은 상당한 파장을 낳았다. 
신 교수와 교유했던 한 문화계 인사는 그가 '석과불식(碩果不食·씨과실은 먹지 않는다)'을 즐겨 말한 것에 대해 
"자신이 전향서를 쓰고 살아남은 이유를 정당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람'을 키워내 혁명 역량을 강화하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한 원로 우파 학자는 신 교수를 '복면지성'이라고 불렀다. 
대중을 상대로는 인간·생명·평화·공존을 말하고, 동지에게는 속마음을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이 학자는 신 교수의 인터뷰·기고·강연을 분석해서 그가 자본주의·미국·대한민국에 비판적이었고, 사회주의·북한에 
호의적이었다고 지적했다.

신영복 교수의 '혁명적 의식'은 청년 시절 형성됐다. 1960년대 젊은 경제학도였던 그는 한국을 식민지로 생각했다. 
이어 감옥에서 만난 빨치산과 남파 공작원 등 비전향 장기수들을 통해 해방전후사와 분단 현실을 대면했다. 
그는 훗날 수감 생활을 '대학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지식인의 관념성을 깨는 자기 개조를 이루고, 생생한 역사 의식을 갖게 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 교수가 감옥에서 보낸 세월 한국 사회는 '조국 근대화'와 '민족 중흥'에 매진했다. 
하지만 과거와 대화하며 사색과 성찰에 몰두한 그는 현재의 행동을 통해 미래를 만들어간 시대의 흐름에서 비켜나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역사 인식은 기묘한 비(非)역사성을 보인다. 
그는 인터뷰 등을 통해 거듭 "인조반정 이후 지배층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는 물론 지금까지도 
서인·노론에서 이어지는 보수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이 격동의 20세기를 거치면서 주도층의 
전면 개편이 이뤄졌다는 역사적 사실을 끝까지 인식하지 못했다.

신영복 교수의 마지막 화두는 동양적 관계론을 통해 근대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그가 그렇게 싫어한 자본주의를 동양 사상을 통해 비판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근대를 향한 한국인의 치열한 고투(苦鬪)를 외면했고, 여전히 진행 중인 한국 사회의 근대적 과제에 대해선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전 세계가 통과한 근대를 건너뛰거나 우회하려던 그의 시도가 공허하게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