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自然과 動.植物

[일사일언] 대나무가 취한 날

바람아님 2016. 6. 6. 07:17

(출처-조선일보 2016.06.06 김은경 한국전통조경학회 상임연구원)


김은경 한국전통조경학회 상임연구원 사진대나무는 절개를 상징하는 나무다. 

대나무가 장마 후에 자라는 놀라운 성장력을 '우후죽순(雨後竹筍)'이라고 한다. 

대나무는 하루에 30㎝도 자란다. 

중국의 유명한 서예가 왕희지(王羲之)는 대나무를 유독 좋아해서 '차군(此君)'이라고 불렀다. 

'이 친구'라는 말이다. 

자신이 사는 곳마다 대나무를 심었던 왕희지는 '이 친구' 없이는 하루도 편안하지 않다고 했다.

가끔은 대나무를 옮겨 심기도 한다. 대나무를 옮겨 심는 날은 음력 5월 13일이었다. 

이날을 죽취일(竹醉日)이라고 불렀다. 대나무가 취한 날이라는 뜻이다. 

이날 대나무를 옮겨 심으면 무성하게 잘 자란다고 했다. 이날은 대나무 줄기에 '죽취일'이라고 써 붙인 뒤 옮겨 심었다. 

물론 대나무가 글을 알 리 없다. 

하지만 절조(節操)가 강한 대나무도 이날만큼은 술에 취한 듯 정신이 몽롱해지고 나른해지기 때문에 이식해도 

잘 살아남는다는 기록이 중국 송나라의 '악양풍토기(岳陽風土記)'에 실려 있다. 어미 대나무에서 새끼 대를 잘라내도 

아픈 줄 모르고, 어미 곁에서 멀리 옮겨 심어도 어미 곁을 떠나는 슬픔을 알지 못한다는 속설도 있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대나무는 뿌리줄기로 번식을 한다.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곳을 대밭이나 대숲이라고 한다. 
대나무는 꽃이 잘 피지 않는다. 대나무에 꽃이 피면 대숲은 모두 죽기도 한다. 
온 대숲이 사실상 한 뿌리에서 번식했기 때문이다. 
혹시 음력 5월 13일을 놓치면, 그다음 날이라도 죽취일이라고 쓴 뒤에 옮겨 심었다고 한다. 
실은 대나무는 굳이 이런 글을 써 붙이지 않아도, 옮겨 심으면 잘 자라는 나무다.

이처럼 조상들은 글도 모르는 대나무를 사람처럼 대우했다. 
옮겨 심었다고 항의하거나 이사를 가기 싫다고 떼쓰지 않는데도 그렇게 했다. 
한 뿌리에서 나서 한자리에서 살다가 꽃 핀 후 한꺼번에 죽는 대나무의 절개를 지켜주려고 했던 것이다. 
가족과 헤어지는 슬픔을 잠시 잊도록 한 것이다.
대나무가 새로 자리 잡을 곳에서 무탈하게 잘 자라 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담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