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의 도란도란 식탁] 종가의 부추김치
"난 여직 귀도 안 먹었어. 이 앞니도 전부 내 이여. 어금니 네 개만 의치야."
허리가 납신 굽은 노종부는 우리를 부엌으로 안내했다. 커다란 양문 냉장고 두 개를 나란히 붙여 놓은 양식 부엌. 혹독한 겨울 추위 때문에 3년 전에 개축했단다. 그래도 선반 두 개에 줄줄이 포개진 나무 밥상이 종가의 부엌임을 여실히 드러냈다. 부엌 한쪽에 차려진 소박한 밥상. 노종부에게 밥을 얻어먹는 게 너무 죄송해서 보리굴비만 맛보면 된다고, 우리는 극구 사양했으나 도리 없이 상 앞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내 평생의 일이 접빈객(接賓客·손님 접대)인데 사양하지 마시게."
밥상의 윗면은 닦였지만 다리 부분엔 먼지가 소복했고 보리굴비는 곰팡이가 슬고 찐득거렸다. 노종부의 치아와 귀는 양호했지만 눈과 혀, 코의 기능이 떨어져 부패한 걸 모르는 눈치였다. 하나 뽀얀 잣 국물에 띄운 수란엔 색색의 고명이 얹혀 있었고 흰 접시에 담긴 부추김치는 그야말로 일품이다. 풋내가 나지 않도록 살살 씻은 부추를 집에서 담근 진한 멸치젓갈에 절였다. 찹쌀풀에 고춧가루+설탕+마늘+통깨를 넣어 담근 부추김치는 기포가 올라오도록 완전 발효시킨 뒤 그날 첫 개봉을 해서 콧속이 뚫리도록 쨍했다.
김치 중에도 파김치와 부추김치는 단맛이 비쳐야 맛나다. 매운 성질을 가진 부추로 김치를 담글 땐 마늘을 넣는 듯 마는 듯 해야 하고 양파는 넣지 않는다. 양파가 들어가면 노린내가 나기 때문. 단, 부추겉절이엔 넣어도 상관없다.
"잡소, 잡소. 많이 잡소. 언 땅을 뚫고 올라온 맏물 부추는 사위한테도 안 준다는 말이 있네. 이건 하우스 부추라서 특별히 주는 거여."
노종부의 말이 귀에 착 감긴다. 칼슘과 철분이 풍부한 부추는 간에 좋고 부추 씨는 예로부터 발기부전의 치료제로 쓰였다. 부추가 양기에 좋다는 말에 같이 내려간 후배 윤은 허발을 하고 먹는다. 짠 기운과 단맛이 맞춤하게 어우러져 맛의 절정을 향해 치닫는 부추김치를 세 접시나 비운 뒤 우리는 공기에 붙은 밥알까지 싹싹 긁어 먹었다. 그날 설거지를 도우며 노종부의 갈퀴 같은 손을 봤다. 작가의 필력이 무르익으면 설렁설렁 써도 글에 윤기가 흐르듯이 손맛도 그러하다. 눈 감고 양념을 대강 넣어도 간이 딱딱 맞는다. 나는 그걸 '간의 신'이 내린 손이라고 표현한다. 그런 손은 항상 물에 불어서 울퉁불퉁하고 못났다. 고운 손을 가진 사람이 요리를 잘한다고 하면 그건 백 프로 거짓말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마음 한 귀퉁이를 여물게 붙잡고 살아서 여태 신이 내린 손맛을 유지하는 구순의 노종부. 4대 봉제사와 불천위 제사, 명절 제사까지 일 년에 제사만 도합 열네 번인데, 서울에 사는 종손은 제사 때만 내려온단다. 종택의 자랑인 연못과 예스러운 돌담, 세월의 무게를 인 육중한 사당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뒷마당에 놓인 크고 작은 장독을 봤다. 장독에 얼비친 햇살 때문인지 괜히 눈물이 찔끔 났다. 종가의 은밀한 사생활을 엿본 탓이다.
종가는 쇠해도 향합은 남는다는 말이 있다. 한 가문의 영고성쇠는 무상해도 전통이나 가풍은 길이 전해진다는 뜻이리라. 종가가 가진 인문·예술학적 가치 운운은 관두더라도 저 노종부가 사라진 뒤에도 과연 이 종가가 유지될까? 종부들의 등골을 알뜰히 파먹은 덕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것이 종가 문화라고 주장한다면, 이 말은 순전히 내 억지에 불과한 것일까? 보리굴비 대신 부추김치를 대접받고 올라오던 날, 집으로 향하는 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人文,社會科學 > 日常 ·健康'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사일언] 살만 빼면 예쁘겠다고? (0) | 2016.06.14 |
---|---|
매실주 담글때 씨 빼고 담가야..발암 물질 생성 (0) | 2016.06.14 |
[워킹맘 다이어리] 정말 다 엄마 때문일까 (0) | 2016.06.12 |
[의학이야기] [각질층] 죽은 피부 세포 밀면 우리 몸 지키는 '돌담' 없어진대요 (0) | 2016.06.08 |
[분수대] 노력에 답이 있다 (0) | 2016.0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