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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최치원이 노닐며 글자 새긴 '해운대'

바람아님 2016. 6. 28. 23:41
중앙일보 2016.06.28. 01:16

해운대(海雲臺)는 바다의 찬 기운이 따뜻한 공기를 만나 생긴 운무(雲霧)가 끼인 대(臺)란 뜻이다. 대는 평평한 바위 반석, 또는 주변 경관을 볼 수 있게 평지보다 높게 쌓은 곳이다. 동백섬 동남쪽 비탈진 넓은 암반 위를 일컫는다.

『동국여지승람』의 동래현 고적편에는 “신라 최치원이 일찍이 대(臺)를 쌓아 유상(遊賞·노닐며 구경함)하였다는 유적이 남아있다. 최치원의 자(子·성인이 됐을 때의 이름)는 해운이다”고 돼 있다. 또 해운대(동백섬)가 “누에머리 내민 모습과 닮았다”고 씌어있다. 최치원(857~?)이 쓴 ‘海雲臺’ 각자(刻字·사진)는 지금도 동백섬에 있다. 해운대의 유래다.


고려말 정포(1309~1345)는 “대는 황폐하여 흔적도 없고 오직 해운의 이름만 남아있구나”라고 노래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고경명은 “…옛적 듣던 해운대를 비로소 올라와서/답답한 가슴 흩어버리니 눈조차 밝아진다/산다화(山茶花)에 비 내리자 붉은빛도 젖어들고/바닷가 산들바람 푸른 빛이 고르구나…”라고 읊었다.

현재 동백섬 정상에는 최치원을 기리는 비(1965년 건립)와 동상(1971), 해운정(1984)이 있다. 해운은 ‘황소의 난’ 때 ‘토황소격문’을 지어 글 솜씨를 떨쳤고, 진성여왕 7년에 건의한 ‘시무 10조의 개혁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유람하다 생을 마쳤다.


해운대에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해운팔경’이 있다. 해운대 대(臺)위에서 바라보는, 끝없이 펼쳐진 하늘과 바다가 첫 번째다. 두 번째는 고기잡이를 하고 돌아오는 돛단배의 풍경을 묘사한 오륙귀범(五六歸帆)이다. 해운대의 주산인 장산의 폭포인 양운폭포, 해운대 온천인 구남온천,장산에서 피어오르는 봉화인 봉대점화도 해당된다. 달맞이 고개에서 바라보는 저녁 노을, 장지천의 흐르는 물, 해운대 춘천천의 고기 뛰어오르는 모습도 8경에 포함된다. 해운대구는 이러한 8경을 바탕으로 최근 해운대 12경과 해운대 야경 7경을 따로 선정해 소개하고 있다.


황선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