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 민주주의는 정체하거나 심지어 후퇴하기 시작했다. 태국의 경우처럼 일부 사례는 구식의 군부 쿠데타가 권위주의 통치의 길로 이끌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민주주의의 퇴보는 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은 행정부 수장이 점진적으로 권력을 축적한 결과였다. 선명한 사례는 푸틴의 러시아이지만 불행히도 민주주의 후퇴 현상은 보다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헝가리·볼리비아·에콰도르·남아프리카공화국·터키에 이어 최근 필리핀이 추가됐다. 필리핀의 신임 대통령은 절차를 밟는 시늉조차 하지 않은 채 범죄자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한다.
게다가 문제의 뿌리는 생각보다 더 깊다. 오래전에 민주주의가 확립된 나라에서도 민주주의적인 통치는 쇠퇴하고 있으며 정치적인 무관심이 증대하고 있다. 여론조사를 해보면 미국과 유럽에서 ‘민주주의가 사는 데 필수적’이라고 믿는 응답자의 비율은 서서히 떨어지고 있다. 놀랍게도 젊은 유권자들이 가장 무관심하다. 아시아의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만·한국·일본에서 응답자들은 아직도 민주주의를 지지하지만 실제 정치 제도에 대한 좌절감은 사상 최고의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나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에 속한다. 나는 태어난 후 처음으로 미국에서 권위주의에 대한 공개적인 토론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특징적인 언행들이 위헌적인 성격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한 멕시코계 판사를 일부 재판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무슬림들의 미국 입국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트럼프는 테러 용의자의 고문을 지지한다.
한데 등골을 가장 서늘하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다. 트럼프와 그의 보좌진은 트럼프가 선거에 졌을 때를 대비하고 있다. 그들은 부정선거의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트럼프는 ‘클린턴 대통령’의 정당성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는 선거 과정 자체의 정당성을 부인하는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