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기원|서은국 지음
21세기북스|206쪽|1만5000원
연세대에서 '행복의 과학'을 수강하는 학생들에겐 첫 시간 이런 질문이 날아간다.
"너희를 가장 행복하게 해줄 사건은 무엇이냐."
강좌를 개설한 15년 전부터 해마다 1위는 한결같다.
'복권 당첨.' 미국에서 100억원짜리 로또를 맞은 21명을 추적해
당첨 1년 뒤 행복감을 조사했더니 보통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복권 당첨=행복'은 답이 아닌 것이다.
서은국(48)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가 쓴 '행복의 기원'은 물벼락 같다.
진화론이라는 내시경으로 행복을 들여다본 이 책은 통념을 산산조각낸다.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이유는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다"
"행복의 가장 큰 결정변인은 유전(DNA)이다"라는 문장 앞에서 어질해진다.
이 진화심리학자의 연구실 문을 쾅쾅 두드렸다.
◇행복은 생존을 위한 수단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최상의 선'이라고 말했다.
매우 비과학적인 주장이다.
의견일 뿐 사실이 아닌 그 말을 성경처럼 떠받들어 온 것이다.
진화론으로 보면 지평선 끝에는 행복이 아니라 생존이 있다.
행복감(쾌감)은 생존하려고 뇌가 만드는 현상이다."
진화론은 21세기 들어 쓰나미처럼 심리학을 덮쳤다.
'인간의 마음은 무엇을 하기 위해 설계됐을까'라는 묵직한 질문이 처음 던져진 것이다.
피카소는 캔버스에, 바흐는 악보에 생을 바쳤지만 생존하는 데 꼭 필요한 행위는 아니었다.
그림이나 음악이 사자와 추위를 막아주지는 않으니까.
서 교수는 창의적 노력에 담긴 본질적 목적을 캐물으며 공작새 이야기를 꺼냈다.
크고 화려한 수컷 공작새의 꼬리는 생존에 큰 장애가 될 수 있다. 포식자 눈에 잘 띄고 도망갈 땐 짐이다.
그들이 멸종하지 않은 것은 다윈에게도 수수께끼였다.
다윈은 "생명체는 후세에 자기 유전자를 남겨야 하는데, 이때 넘어야 할 엄청난 장벽이 성공적인 짝짓기"라는 답에 닿는다.
피카소도 마찬가지다.
"진화론으로 해석하면 '피카소라는 생명체가 본질적인 목적(유전자를 남기는 일)을 위해 창의력이라는 도구를 사용했다'가
된다. 마음의 정신적 산물들은 몸의 번성을 위한 도구인 셈이다."
이 책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가'가 아니라 '행복이라는 경험의 역할'을 파헤친다.
꿀벌이 꿀을 모으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듯 인간도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다.
서 교수는 "행복은 생존을 위한 수단일 뿐"이라며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 행복감을 느끼도록 설계돼 있다"고 했다.
◇행복의 개인차는 DNA가 결정한다
행복 지침서들은 "낙관적으로 생각을 바꾸면 행복해진다"고 조언한다.
서 교수는 '공허한 말장난'이라며 기우제(祈雨祭)에 빗댔다.
"기다리는 단비가 언제 오는지 알려면 습도·풍향 같은 자연을 이해해야지, 기우제에 현혹돼서는 행복의 본질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행복감이라는 '뇌 속 전구'는 호모사피엔스를 가장 필요한 자원으로 유인하기 위한 신호였다.
음식을 먹을 때, 데이트를 할 때 우리는 행복감을 경험해야 한다.
그래야만 또 사냥을 나가고 짝짓기를 할 테니까.
인간이 왜 행복감을 느끼는가에 대한 내 답은 간명하다. 생존, 그리고 번식."
뇌는 경쟁에서 살아남은 조상이 물려준 '사회적 생존 지침서'라고 그는 말한다.
이 패키지의 핵심 내용물은 고통과 쾌감이다.
"고통을 경험하지 못하는 동물은 오래 살 수 없다.
다리에 박힌 못이 아프지 않으면 치료하지 않을 것이고 결국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
고통의 진원지는 다리가 아닌 뇌이고, 진통제는 뇌를 다스린다.
쾌감(행복감)도 마찬가지다. 쾌감을 상실한 동물은 생존에 불리할 수밖에 없다."
서 교수는 승진을 예로 들었다.
뇌의 행복 전구가 켜지는 까닭은 승진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의 축하와 인정 때문이다. 그는 이 대목에서
"행복은 객관적 삶의 조건에 크게 좌우되지 않으며, 행복의 개인차를 결정하는 것은 그가 물려받은 유전적 특성,
구체적으로는 외향성"이라며 여동생 이야기를 덧붙였다.
"여동생은 행복 논문 한 줄 읽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나보다 훨씬 행복하다.
행복이 이론(생각)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산증인이다. 유전은 쉽게 말해 카드 50장을 받은 거다.
어떻게 섞느냐에 따라 형제간에도 성향이 달라진다."
행복은 달콤한 아이스크림과 같다. 반드시 녹는다. 어떤 사건이 만든 기쁨이나 슬픔은 3개월 이상 지속되기 어렵다.
"생존하려면 적응하고 잊어야 한다. 사람은 그렇게 설계돼 있다"고 서 교수는 말했다.
돈이 지나치게 많은 것은 비타민C만 과다 섭취한 것과 같다. 건강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그는 "행복은 돈도 명예도 아니고 결국엔 사람이 자산"이라고 했다.
[한국인은 왜 덜 행복한가]
'他人의 거울'에 갇힌 사람 많아… 勝者가 되는 건 극소수
갤럽이 국민 행복지수를 조사할 때마다 주목받는 세 나라가 있다.
한국(2012년 97위), 일본(59위), 싱가포르(148위). 경제 수준과 행복이 동행한다는 일반론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서은국 교수는 “세 나라 국민은 행복의 잣대를 자신 안에서 규정하지 않고 획일적이고 사회적인 잣대를 쓴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한국심리학회의 2011년 ‘한국인의 행복’ 조사도 그렇게 나타났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봤을 때 내가 행복하다고 할 만한 삶을 살고 있나’ 자문하는 경향이 높았다.
서 교수는 “타인이라는 거울에 반사된 내 모습을 행복의 잣대로 삼는 것”이라며
“40대 남자라면 자식이 어떻고 직함이 어떤지로 행복을 평가하기 때문에 승자(勝者)는 극소수”라고 했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행복지수가 높은 까닭은 복지나 GNP 때문이 아니다.
서로 존중하고 결정적인 것엔 참견 안 하는 개인주의적 철학, 자유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