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6.09.12 김은경 한국전통조경학회 상임연구원)
매년 9월이 되면 햇밤을 기다린다. 9월 초순부터 수확이 가능한 햇밤의 반질거리는 빛깔도 좋지만,
그보다 더 좋아하는 건 달콤한 밤을 입에 넣고 씹을 때 나는 '뽀드득' 소리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입안으로 단맛이 퍼지면 자연스럽게 행복감에 잠긴다. 9월엔 생밤을 주로 먹지만 10월이 되면
밤마다 밤을 삶아서 숟가락으로 파먹는다.
어릴 때 어머니는 밤을 삶아 주실 때면 "밤을 한 달 내내 먹으면 문지방을 못 넘는다"고 말씀하셨다.
밤만 계속 먹다 보면 자칫 문지방도 못 넘을 만큼 살이 찔 수도 있다는 일종의 경고였다. 그때는 그 말이
진짜라고 믿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보니 매년 한 달간 밤을 먹어도 문지방은 쉽게 넘을 수 있었다.
일본의 근대 소설가 도쿠토미 로카(德富蘆花)는 그의 저서 '자연과 인생'에서 밤에 대한 애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밤은 야인(野人)으로 나무껍질은 꺼칠꺼칠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어눌하고 말재주가 없어 어떠한 알랑거림도 싫어한다.
가시 돋친 겉껍질의 가시나무 울타리, 두꺼운 갑옷, 더구나 그 위에 감물을 들인 갑옷까지 입고,
심오하고 달콤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비록 제 성질을 감추는 것은 잘 되지 않더라도 너무나도 밤을 사랑하게 된다."
이 땅에서 자라는 토종 밤은 달지만 잘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토종 밤 중에도 달고 큰 밤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 '밤 박사님'이 있다.
국립산림과학원 이욱 박사는 전국을 다니면서 밤나무혹벌의 피해에서 살아남은 토종 밤나무의 유전자를 보존하고 개량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달면서도 알이 굵은 품종을 개발해서 밤 재배 농가에 보급하는 일도 한다.
그가 개발한 밤 품종 중에는 한가위 차례상에 올리는 밤이라는 뜻의 '한가위'도 있다.
곧 추석이 다가온다. 올해도 추석 차례상에는 밤이 올라갈 것이다. 벌써부터 밤 먹을 생각에 추석이 기다려진다.
가뭄이 들어 배를 곪아야 했던 시절, 구황(救荒) 작물로 쓰여 많은 이를 연명하게 해주었던 밤.
무더운 여름 뒤, 알알이 충실하게 열린 밤송이처럼 넉넉하고 풍성한 명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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