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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22] 재난영화

바람아님 2013. 7. 31. 07:45

(출처-조선일보 2009.08.29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중세사)


영화는 사회의 다양한 모습들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할리우드 영화의 역사가 이를 잘 보여준다. 1929년의 대공황 이후에는 프랑켄슈타인, 드라큘라, 늑대인간 같은 괴물들이 등장하는 영화가 큰 인기를 누렸는데, 이는 사회 전체를 충격 속에 몰아넣은 거대한 경제적 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냉전의 긴장 상황이 극에 달했던 1950년대에는 지구를 공격하는 외계인의 침입을 그린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평화롭게 살아가는 '우리들'과 이를 위협하는 '그들'이라는 설정은 분명 미국과 소련 간의 대립을 연상시킨다.

1970년대에는 재난영화라는 새로운 장르가 만들어졌다. 엄청난 규모의 지진, 대화재, 어마어마한 파도와 같은 가상의 대재앙을 그린 이 영화들은 석유파동으로 대변되는 에너지 위기, 패배로 끝난 베트남 전쟁, 워터게이트라는 정치적 격변 등의 시대 배경에서 탄생했다. 가장 대표적인 영화로는 1972년에 나온 로널드 님 감독의 '포세이돈 어드벤처'를 들 수 있다.

초대형 여객선 포세이돈 호가 엄청난 파도에 전복되는 사고를 당한다. 생존자들은 연회장에 모여 어떻게 할 것인지 논쟁을 벌이다가 여러 집단으로 나뉘는데, 그중 목숨을 구한 것은 '배의 내부에 구원의 길이 있다'고 선언한 목사를 따라간 소수의 사람들뿐이다. 미국 사회가 완전히 뒤집어지고 방향을 잃은 상황에서 믿음을 가진 자들만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영화의 내적인 메시지로 보인다.

오랜만에 10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끌어 모은 우리 시대의 재난영화 '해운대' 역시 'IMF 사태'에 뒤이어 또다시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는 현재 우리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100만명의 피서객들 위로 거대한 쓰나미가 들이닥쳐 엄청난 피해를 입힌다. 특히 돈의 논리에만 따르는 사람들, 자신의 입신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은 고립되고 소외되어 더 큰 위험에 빠지지만, 진정한 사랑을 간직한 사람들은 시련을 이겨낸다.

할리우드식 재난영화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위험 없이 오락의 일환으로 재난을 구경하는' 역할에 그치므로, 이런 영화에서 너무 큰 의미를 찾을 필요는 없다. 다만 서민들의 따뜻한 마음씨와 아름다운 사랑과 용기가 크나큰 위기를 극복하는 힘이 되리라는 소박한 메시지가 고통스러운 이 시대에 작은 위안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