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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7] 인플루엔자

바람아님 2013. 7. 31. 07:49

(출처-조선일보  2009.05.19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생물 간의 관계에는 크게 보아 네 가지 형태가 있다. 경쟁(競爭), 공생(共生), 포식(捕食), 기생(寄生)이 그들이다. 한정된 자원을 놓고 벌이는 경쟁은 기본적으로 관계하는 모두에게 해(害)가 된다. 경쟁의 반대편에는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공생이 있다. 포식과 기생은 상대에게 해를 끼치며 자기만 이득을 취하는 일방적인 관계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포식동물은 상대를 곧바로 죽이지만 기생생물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쉽사리 자기가 몸담고 있는 숙주를 죽이는 것은 스스로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년 세계적으로 거의 3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말라리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고민해야 했다.

그러다가 최근 의학과 진화생물학의 융합으로 새롭게 태어난 학문인 '다윈 의학' 덕택에 병원균의 독성은 그 전염 메커니즘에 따라 달리 진화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감기 바이러스는 감염된 사람이 너무 심하게 아파 전혀 외부 출입을 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라도 자꾸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 재채기도 해대고 콧물 훔친 손으로 악수도 해야 다른 숙주들로 옮아갈 수 있다. 반면 말라리아 병원균은 감염된 사람이 중간숙주인 모기를 쫓을 기력조차 없을 정도로 아프게 만드는 게 더 유리하다. 감기에 걸려 죽는 사람은 많지 않아도 말라리아는 여전히 우리 인류에게 가장 무서운 질병으로 남아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창궐할 때마다 과거 스페인 독감의 경우를 들먹이며 지나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세계보건기구(WHO)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다. 안심보다는 경고가 훨씬 안전한 전략이겠지만, 방역 체계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한 스페인 독감 시절과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 이번 신종 인플루엔자의 국내 첫 감염자였던 수녀님은 당신의 증상에 의구심이 생기자마자 스스로를 철저하게 격리시키고 자발적으로 보건당국에 신고했다. 이처럼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전염경로를 근본적으로 차단하면 독성이 강한 병원균은 이미 감염시킨 숙주와 운명을 같이할 뿐이고 독성이 약한 것들만 돌아다니게 된다. 이처럼 독성과 전염성은 서로 연관되어 있는 속성들이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민주시민의 덕목만 잘 지켜도 악성 병원균의 횡포를 상당 부분 막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