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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욱의 영화 & 역사] 테무친, 자신을 극복하고 칭기즈칸이 된 사나이

바람아님 2016. 11. 3. 10:19

(조선일보 2016.11.03  남정욱 작가)


9세 때 아버지 잃고 마을서 쫓겨나 고작 10만 병사·200만 백성 데리고

파격적 사고 전환·유연성 발휘해 사상 최대 제국 건설한 칭기즈칸

"나를 극복하는 순간 나는 내가 되었다"


남정욱 작가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인구를 감소시킨 사나이, 혹은 로마를 뛰어넘는 개방적인 시스템으로 

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 사나이. 이 사람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극단으로 갈린다. 

몽골제국의 창업자 칭기즈칸 이야기다. 어릴 적 이름은 테무친이다. 

'단단한 쇠'라는 뜻으로 그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자기가 죽인 타타르족 맹장 이름을 가져다 붙였다. 

어머니 호엘룬은 메르키트족에게서 납치해온 여성이었다. 

나중에 테무친의 아버지는 타타르족에게 독살당하고 테무친의 아내는 메르키트족에게 납치당했으니 

한 골씩 주고받은 셈이다. 

초원의 중앙은 목초가 풍부하지만 멀어질수록 풀이 빈약해진다. 

어디에서 사느냐가 유목민들의 서열이다. 

몽골족이 처음 초원에 등장했을 때 이들은 가장자리에 겨우 발을 붙이고 있는 작은 부족에 불과했다. 

이런 몽골족이 10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세계에서 가장 넓은 제국을 건설한 것은 경이 그 자체다. 

군대가 많았냐. 그것도 아니다. 겨우 10만 명이었다(이것은 경이를 넘어 기적이다). 비결은 유연성이었다. 

그는 이 동네와 싸우며 배운 기술과 무기를 저 동네와 싸울 때 써먹었고 저 동네와 싸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동네는 중국, 저 동네는 유럽이다.


아버지가 죽고 씨족들에게 배신까지 당한 테무친은 유목민으로서는 파격적인 사고의 전환을 한다. 

씨족보다 동료, 형제보다 전우를 앞세웠다. 

'누케르'라고 하는 이 동료들은 출신을 따지지 않는 테무친의 조직 관리에 끌려 가입한 전사(戰士)들이다. 

칭기즈칸의 근위대였던 이들은 나중에 유럽과 아시아를 뒤흔드는 명장이 된다. 

몽골제국의 유럽 침공은 칭기즈칸이 아니라 그의 아들 오고타이의 업적이다. 

오고타이는 아버지가 박살 낸 제국인 호라즘 서쪽이 궁금해졌다. 

그는 우크라이나를 밟고 넘은 뒤 군대를 나누어 폴란드로 북상하고 헝가리로 남하한다. 

이를 맞아 싸운 이가 슐레지엔 왕 하인리히 2세다. 

백병전이 특기였던 유럽의 철갑 기사(騎士)들은 바람처럼 달려와 안구에 화살을 박고 가는 몽골 기병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하인리히 2세는 전사하고 이 전투로 유럽의 기사 시대가 막을 내린다. 

몽골에서는 왕이 죽으면 공식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수도인 카라코룸으로 돌아와야 한다. 

오고타이가 죽지 않았으면 유럽의 모든 도시는 폐허가 되었을 것이다.


[남정욱의 영화 & 역사] 테무친, 자신을 극복하고 칭기즈칸이 된 사나이

/이철원 기자


기병만큼이나 빠른 게 몽골의 정보 전달 시스템이다. 

몽골어로 '잠'이라고 부른 이 역참은 제국을 거미줄처럼 연결해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소식을 실어 날랐다. 

카라코룸에서 부친 편지가 헝가리 부다페스트까지 도착하는 데는 일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역참마다 준비된 수백 마리의 말이 50㎞씩 스무 번을 교대해서 하루 1000㎞를 달렸다. 

이 거미줄은 통신로이자 무역로였다. 

베네치아 상인은 중국에서 고려의 종이를 사다가 이슬람 도시에 팔았다. 

서아시아의 천문학과 수학이 동아시아로, 인쇄술과 화약 나침반이 중국에서 유럽으로 흘러갔다. 

몽골제국의 의미를 야만과 잔인에 가둘 수 없는 이유다. 닥치는 대로 베고 썰고 잔인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고대와 중세의 역사에서 잔인이라는 단어는 별로 특별할 게 없다. 

당시 세계는 잔인할 기회를 가져본 민족과 남에게 그런 기회를 준 민족이 있었을 뿐이다. 

정복 당시의 잔인은 통치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몽골은 정복지의 취향을 존중했고 결코 강요하지 않았다. 

한바탕 혼이 난 뒤 프랑스 국왕 루이 9세는 수도사인 루브룩이라는 인물을 몽골에 파견한다. 

정보 수집과 (가능하다면) 몽골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이 임무였다. 루이 9세는 몰랐다. 

4대 칸인 뭉케의 어머니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는 것과 칭기즈칸이 나라를 세울 때 종교의 자유까지 

이미 선포했다는 사실을.


이렇게 흥미진진한 게 칭기즈칸과 몽골제국이지만 영화로 만들어진 것은 몇 편 안 된다. 

맞은 기억이 생생한 유럽은 악감정이 있고 중국은 한족 이외의 정권은 내리깎으며 몽골은 큰 영화 만들 돈이 없다. 

2007년 세르게이 보드로프 감독이 만든 '몽골'이 그나마 대표적인데 3부작으로 기획된 영화가 1편 나오고 

10년 무소식인 걸 보면 앞으로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쌍꺼풀 없는 배우들이 대거 등장하는 '몽골'에서 칭기즈칸 역은 일본 배우 아사노 다다노부가, 

무술 감독은 한국의 정두홍이 맡았다. 칭기즈칸은 까막눈이었다. 

그래서 그의 어록은 눈이 아니라 마음에 와 부딪친다.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는 10만, 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00만도 되지 않았다. 나를 극복하는 순간 나는 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