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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당신들만 아는 이론은 이제 지겹다

바람아님 2016. 11. 5. 13:22

(조선일보 2008.04.11 이선민 논설위원)


인문학의 즐거움 (원제 Arts of Living)

커트 스펠마이어 지음|정연희 옮김|휴먼앤북스|497쪽|2만5000원

001.3-ㅅ736ㅇ/ [정독]인사자실(2동2층)


1968년은 세계사에 기록될 만한 중요사건이 많이 발생한 해였다. 

서양의 대학가에서는 극렬한 반전(反戰)시위가 일어났고, 미국에서는 흑인민권운동 지도자 킹 목사가 

암살됐다. 체코에서 '프라하의 봄'이 시작되자 소련은 군대를 보내 진압했다. 

베트남 전쟁은 더욱 격렬해졌고,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이들 사건보다 미국 인문학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한해 앞서 출간된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그래머톨로지에 관하여'라는 책이었다. 

언어와 글쓰기가 모든 것의 출발점이며, 텍스트 밖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펴는 

데리다를 비롯해서 들뢰즈·가타리·푸코프랑스 학자들의 저서가 미국에 소개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불타고 있는 세계보다 학자의 머리 속에서 나온 난해한 이론이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미국 러트거스대 영문학 교수인 저자는 지금 미국 인문학이 직면한 위기의 직접 원인은 여기에 있다고 진단한다. 

몇몇 권위자들이 만들어낸 초(超)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전문가만 이해하는 글을 쓰는 것이 주류가 되면서 

인문학은 세상과 대중에게서 고립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로마제국쇠망사'의 저자인 기본 같은 역사가의 저서는 대중소설을 능가하는 독자층을 갖고 있었지만, 

오늘날 역사학자는 오로지 다른 역사학자들을 위해서만 글을 쓴다. 

인문학자들은 보통 사람의 생활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연구에 몰두하면서 예술과 사상은 본래 그런 것이라고 강변한다.



영국 글로브 극장이 고증을 통해 셰익스피어 시대 연극 형식을 재현한〈사랑의 헛수고〉. 

저자는“인문학은 상아탑 밖으로 나온 삶의 예술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국립극장 제공


그러나 길게 보면 미국 인문학의 이런 선택은 19세기 중반 이후 미국 사회와 대학이 변화한 데 따른 것이었다. 

민주적 지역공동체 중심이던 미국은 이 무렵 관료들이 지배하는 중앙집권적 행정국가로 변모했다. 

이에 따라 대학들도 교육보다 연구 중심으로 탈바꿈했다. 

과학이 학문의 모델이 됐고, 법학과 의학을 필두로 모든 분야가 전문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사회의 주역이던 '시민'은 무지한 '대중'으로 전락하고 전문가들은 이들과 분리돼 상아탑 속에 숨어버렸다. 

이처럼 엘리트주의귀족주의에 지배된 것은 인문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인문학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저자는 자폐(自閉)적인 이론을 버리고 대중의 생생한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똑같이 원시사회를 다룬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탐험가 핸슨의 '마나우스로 가는 여행'을 비교한다. 

전자는 최고 전문가의 눈에만 보이는 깊은 구조를 탐구해야 한다는 목적 의식이 선명하다. 

후자는 눈에 보이고 느껴지는 것을 선입관 없이 서술해나갔다. 

저자는 훈련된 인류학자 보다 아마추어 저술가가 더 대상을 실체에 가깝게 이해했다고 본다.


이처럼 과학을 모방하려는 인문학의 열망은 실패로 끝났다. 그 대안은 예술이다. 

인문학이 잃어버린 전체성을 회복하고 바깥 세상과 공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예술이라는 것이다. 

그는 행위를 중시하는 예술이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하는 대학 사회에서 억압 받는 현실을 개탄한다. 

"이론은 없다! 작품이 있을 뿐"이라는 세잔느의 일기를 인용하며 미술 창작을 외면하는 미술사학자들을 비판한다.


대중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대학 밖의 인문학에도 주목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시하는 것은 신비한 종교적 체험을 강조하는 뉴에이지다. 거칠고 비학문적이라고 폄하되는 

뉴에이지에 대해 이 책은 '우리 시대가 생산할 수 있는 최고의 인본주의적 사고'라고 높이 평가한다.


'실용주의자'인 저자는 인문학자들이 시장(市場)을 받아들이고 서비스 공급자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시대의 중요 문제에 대해 적극 발언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의학 인문학' '법 인문학' '미디어 인문학'처럼 활동 영역에 따라 다른 학문과 연결될 수도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현실사회에 대한 대안을 더 만들어내는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개인의 경험을 중시해야 한다는 저자의 지론은 오랫동안 대학생들에게 작문을 가르쳐온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라 현실세계를 해석하는데 필요한 다양한 지식의 활용법을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학생들이 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대학 바깥에까지 가져갈 수 있을 때 인문학이 임무를 완수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500쪽 가까운 방대한 책의 곳곳에는 미국 대학에 영향을 남긴 수많은 학자와 저술이 등장해서 따라 읽기가 다소 벅차다. 

또 지나치게 실용적인 저자의 입장에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대학 역시 이 책에서 "전세계의 대학교수들이 식민시대를 맹렬히 복원하고 있다"며 

미국 대학의 교과과정을 그대로 베끼는 현실을 냉소적으로 갈파한 상황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원조(元祖)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처방이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점이 많다는 사실이 쉽게 이해된다.



로마제국쇠망사(전6권)/Edward Gibbon

송은주;윤수인 [같이]옮김/ 민음사/ 2009/ 4200p

922-ㄱ615롤-1=2 / [정독]인사자실서고2(직원에게 신청)


(청소년을 위한) 로마제국 쇠망사/ 에드워드 기번

배은숙 지음/ 두리미디어/ 2010/ 351 p 

922-ㄱ615론/ [정독]인사자실(2동2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