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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부희령] 여자들

바람아님 2016. 11. 14. 23:34
국민일보 2016.11.10 17:28

전동차가 환승역에 멈춰 서자 통로에 서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간다. 마주 보이는 건너편 좌석에 학생처럼 보이는 앳된 여자 하나가 책을 읽고 있는 게 눈에 띈다. 책 제목을 눈여겨본다. ‘처음 만나는 문화 인류학.’ 대학의 중간고사 기간이 시작되었나 보다. 오래전 내가 학생이었을 때 인류학 시간에 읽었던 책 내용이 떠오른다.


그 책에서는 남성들이 세상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 원인이 전쟁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원시사회에서 생계를 위한 노동과 육아는 거의 여성들 몫이었으며, 남성들은 자신들이 생산하는 식량의 양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을 먹어치우는 비효율적 존재였다.

그러나 인구조절과 식량문제 해결을 위해 정기적으로 전쟁이 일어났고, 여성보다 전투 능력이 뛰어난 남성들이 주도권을 잡았고 영아살해의 풍습에서도 더 많이 살아남았을 것이라는 설명을 한다(마빈 해리스, ‘문화의 수수께끼’). 과연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은’ 게 사실인 듯.


전철역에서 나와 도서관을 향해 걷는다. 햇빛은 쨍한데 바람이 차다. 길 양쪽에 늘어선 은행나무 플라타너스 그리고 또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의 잎사귀들이 온힘을 다해 마지막 빛을 뿜어내고 있다. 할머니들을 앞질러 가면서 나누는 이야기를 엿듣는다. 올해 단풍은 작년보다 빛깔이 못해. 작년에는 정말 예뻤어. 샛노랗고 다홍빛이었지.


웬일인지 평일 오전임에도 도서관 입구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다. 얼굴은 뽀얗고 입술은 앵두 같은 여학생들이다. 저것 봐, 쟤가 또 너 쳐다봤어. 쟤 맞지? 저 멀리 길모퉁이에 무리지어 서 있는 남학생들을 힐끔거리며 수군댄다. 나도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돌아본다. 다 똑같이 생겼는데 어떻게 서로를 알아볼까. 물론 한때 나에게도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여학생들 머리 위로 노랑 다홍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할머니들 말씀이 틀렸다. 올해 단풍도 예쁘다.


부희령(소설가), 삽화=전진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