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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장지영] 예술은 정치의 시녀인가

바람아님 2016. 12. 1. 23:28
국민일보 2016.12.01 17:30

정치권력 놀이터가 되었던 문화예술계, 예술가 선택은 역사의 심판 받게 돼 있어

독일 출신의 여성 감독 레니 리펜슈탈(1902∼2003)은 영화 역사상 가장 뛰어난 기록영화 감독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101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그에게는 ‘히틀러를 만든 여인’ ‘나치의 핀업걸’이라는 비난이 따라다녔다. 리펜슈탈은 나치에 부역한 대표적 예술가였다. 그가 감독, 주연, 편집까지 혼자 해낸 첫 영화 ‘푸른 빛’(1932)을 감명깊게 봤던 히틀러는 그를 불러들여 측근으로 삼았다. 일찍부터 영화가 가진 정치선전 효과에 주목했던 히틀러는 그에게 1933년 나치당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기록할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 임무를 맡겼다. 그리고 그는 ‘뉘른베르크 3부작’으로 알려진 ‘신념의 승리’(1933), ‘의지의 승리’(1934), ‘자유의 날-우리의 국방력’(1935)을 만들었다.


이 가운데 ‘의지의 승리’는 선전영화가 미학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다채로운 몽타주 기법을 활용해 히틀러를 신적인 존재로 미화하고 나치의 광기를 감동적으로 포장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의 재능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 관한 다큐멘터리인 ‘올림피아’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1부 ‘민족의 제전’과 2부 ‘미의 제전’으로 구성된 ‘올림피아’는 아직도 영화사 최고의 스포츠 다큐멘터리로 평가받고 있다. 고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는 장면 역시 이 다큐멘터리에 담겨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전에 따라나섰던 그는 나치의 폴란드인 학살을 보고는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선전영화에서 손을 뗀 뒤 극영화 ‘저지대’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전쟁이 끝나자 그는 나치의 조력자로 바로 체포됐다. 나치당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그는 결과적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민심은 그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그가 10년 만에 완성한 ‘저지대’를 1954년 프랑스 예술계의 거물 장 콕토의 배려로 칸 영화제에 출품했을 때 대규모 시위대가 몰려들어 비난을 퍼부었다. 이후에도 그가 관여하는 영화 제작 프로젝트는 대중의 비난을 받아 좌초되기 일쑤였다. 결국 영화계 복귀를 포기한 그는 대신 1960년대부터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다시 한번 재능을 인정받기도 했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 “내 인생에 가장 큰 잘못은 히틀러를 만난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히틀러를 선택한 것은 그 자신이었다. 당시 온갖 영화를 누린 그와 달리 나치에 저항하며 양심을 지킨 예술가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 수많은 예술가들이 미국 망명을 택한 가운데 조국인 독일에 남은 작곡가 겸 연출가 카를 아마데우스 하르트만은 주목할 만하다. 하르트만은 나치 지배 기간 동안 모든 공적인 활동을 끊고 구멍가게 운영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작곡했다. 권력에 타협하지 않은 하르트만의 모습은 리펜슈탈의 모습과 대비된다. 실제로 리펜슈탈의 뛰어난 기록영화는 그의 재능과 함께 히틀러의 대규모 물량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최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문화예술계에서는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검열을 주도한 부역자 청산에 대한 목소리가 높다. 문화예술계가 정치권력의 놀이터가 되었던 만큼 그 분노가 다른 분야보다 유독 큰 것이다. 권력은 늘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술을 이용하려는 속성을 가졌다. 하지만 예술이 정치의 시녀가 될지 안 될지는 예술가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 그리고 리펜슈탈의 사례에서 보듯 그 선택에 따른 결과는 반드시 역사의 심판을 받게 돼 있다.


장지영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