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日常 ·健康

[일사일언] 술 향기, 사람 내음

바람아님 2016. 12. 14. 09:37

(조선일보 2016.12.14 홍승기 배우·인하대 로스쿨 교수)


홍승기 배우·인하대 로스쿨 교수연말이 되면 건배사가 말썽이다. 

참석자를 일일이 세워서 한마디씩 강요하는 자리는 여간 곤혹스럽지 않다. 

주최한 이가 건배사를 시작하면 그때부터 심장은 울렁증이다. 

원래 술을 즐기지 않으니 술맛이야 따질 일이 없지만 안주에도 손이 가지 않는다. 

다들 술잔을 들고 나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면 참으로 황망한 일이다. 

노래방에서 노래시키고 일행은 딴청 부리듯, 건배사 시키고 좌중이 듣지 않으면 그것도 불편하다. 

분위기에 맞는 말을 잘만 만들어내는 이도 있지만 술잔 앞에서 사설(辭說) 읊기는 정말 체질이 아니다.


몇 해 전 이맘때 신영균문화재단을 준비하면서 모인 자리였다. 영화배우 박중훈이 잔을 잡았다. 

신영균 선생 연배의 연세 지긋한 어른들이 여러 분 앉아 계셨다. 

박씨는 자신이 선창할 테니 "예, 형님"으로 받으라 했다. 

바로 이어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많이들 먹었냐?" 하고 고함쳤다. "예, 형님"과 함께 폭소가 터졌다. 

박씨는 '원래 어려운 자리에서만 하는 건배사인데 오늘은 젊은 분들이 많아서 약발이 약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몇 번 그 건배사를 표절하였다. 파괴력은 훌륭하나 범용성이 부족했다.


제천의 청풍영상위원회 이사회에서 연극하는 선배가 건배사를 했다. 

'주향백리(酒香百里) 화향천리(花香千里) 인향만리(人香萬里).' 

술 향기는 백 리를 가고, 꽃향기는 천 리를 가며, 사람의 향기는 만 리를 간단다.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고장이라 분위기도 맞았다. 

마지막 '인향만리'에는 참석자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설을 붙일 수 있으니 호환성도 강했다. 

한마디를 보태야 되는 술자리에서 애용한다.


[일사일언] 술 향기, 사람 내음


불안한 세월에 가슴에는 삭풍(朔風)이 몰아친다.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는 꽃망울을 틔운다는데, 꽃향기보다 은은한 내음을 날릴 지사(志士)가 그립다. 

흔들리는 때일수록 기품 있는 선비 정신이 간절하거늘 우리의 지사는 어디쯤 오고 있을까, 도대체 오기는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