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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기의 책보기]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의 힘'.. 그 사람을 가졌는가

바람아님 2017. 1. 26. 23:24
경향비즈 입력 2017.01.25 17:08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의 힘ㅣ박상미 지음ㅣ북스톤ㅣ312쪽

‘그 사람을 가졌는가? /

만리 길 나서는 날 /

처자를 내 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온 세상 다 너를 버려 /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

<너 뿐이야>하고 믿어지는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탔던 배가 가라앉을 때 /

구명대를 서로 사양하며 /

<너만은 살아다오>할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불의의 사형장에서 /

<다 죽어도 너의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

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잊지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

<너 하나 있으니...>하며 /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오>하고 /

가만히 머리 흔들고,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

그 한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고(故) 함석헌 님의 시로 알려진 ‘그 사람을 가졌는가?’ 전문이다. 시집이 없어 인터넷 정보를 참고한 것이라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주제를 다룬 또 한 편의 명 수필이 있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은 친구… …’를 담고 있는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이다.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의 힘>의 저자 박상미 씨가 쓴 ‘배우 김혜자 씨 인터뷰를 앞두고 며칠을 끙끙대며 사전 공부를 하느라 진이 빠졌다’는 글을 어딘가에서 봤을 때 쉬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은?’ 등등 주제에 맞춰 적당한 질문 몇 가지 대충 만들어 가면 될 일 아닌가 해서였다.

그런데 저자의 저 책을 읽고서야 그 의문이 단번에 풀렸다. 그건 보통의 인터뷰가 아니라 ‘동고동락(同苦同樂)’이었다. 바쁘거나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을 붙잡고 짧은 시간에 그들 인생의 진솔함과 희로애락을 가감 없이 풀어놓게 하려면 인터뷰에 응하는 당사자보다 더 그를 속속들이 알고 가야 했던 것이다.


자신의 속살을 이미 훔쳐보고 온 저자와 상대방은 함께 웃고, 함께 울며 격식이 아닌 내용으로 합체되었다. 그런 합체의 엑기스가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이다. 그 한 사람이 아버지나 어머니, 남편이나 아내일 수 있고 친구일 수도 있다. 가시밭길과 장미꽃길이 교차하는 인생의 굴곡을 흔들림 없이 헤치도록 마지막 버팀목이 돼주는 바로 그 한 사람이 그들 곁에 어김없이 있었다.


어떤 사람을 두고 시인이 ‘그는 인류의 위대한 등불이었노라’고 하면 너무 함축적이다. 평전이나 전기로 구구절절 풀어놓으면 중간중간 독자의 인내가 필요하다. 스토리텔링 전문 글쟁이이자 수필가인 저자가 ‘진이 빠지도록’ 준비했던 인터뷰를 통해 정리한 열 사람의 이야기는 읽기 딱 좋을 만한 분량의 ‘대화’인데 그 주제가 ‘내게 힘이 돼준 사람과 사랑’이어서 공감과 감동이 따른다.

저자의 ‘여성적 문체’와 독자의 감정적 호흡에 맞춘 글의 흐름이 편안하다. 배우 김혜자 씨의 버팀목은 작고한 남편이었다. 


남편의 묘를 쓰던 날의 묘사는 눈물이 많이 난다. 박동규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의 버팀목은 ‘지독하게 가난했던 아버지 박목월 시인’이었다. 우리문학이 박목월 시인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또 오로지 시인의 아내 덕분이다. 부부의 사랑이 감동을 넘어 숭고함으로 다가온다. 무대미술가 이병복, 연출가 표재순, <농무>의 시인 신경림과 그의 친구 전우익, 가수 인순이, 문학평론가 형제 황현산과 황정산, 미국 입양 후 귀환한 사회운동가 섀넌 두나 하이트 등 모두 열 명의 격정시대 ‘살며 사랑하는’ 이야기들이다.


2년 전 저자는 <마지막에는 사랑이 온다>는 책을 펴냈었다. 그 책의 등장인물들 역시 자신을 믿으며 끝까지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저자를 관통하는 삶과 인간의 키워드가 ‘사랑’인 듯싶다. 이때의 사랑은 역시 ‘내게 힘을 주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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