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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의 작은 천국] 사람의 향기

바람아님 2017. 3. 26. 23:44
국민일보 2017.03.25 00:01
아홉 살때 시집 와 80년 가까이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이금선 할머니가 아궁이 옆에 앉아 있다.
김선주 목사

올해 87세 되신 우리교회 이금선 할머니는 나하고 참 친합니다. 잘 걷지도 못하면서 멀리서 나를 알아보고 지팡이 짚은 손까지 번쩍 들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나비처럼 날아옵니다. 우리는 며칠 전에 보고 오늘 또 보는 건데도 견우와 직녀처럼 얼싸안고 서로 등짝을 쓰다듬습니다. 그는 내게 너무 다정합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글쭈글하고 검버섯에 뒤덮인 그의 얼굴에 내 볼을 대고 부비며 나는 어린 고양이처럼 그르렁거립니다. 고양이는 기분이 좋고 평안할 때 그르렁 소리를 냅니다. 나도 그를 만나면 턱 밑에서 그르렁 소리가 나는 듯합니다.


그런데 그의 몸에서 노인 냄새가 납니다. 하지만 나는 그 냄새가 참 좋습니다. 그건 진액이 다 빠져나오도록 가마솥에 고아서 결국에는 곰국처럼 엉겨나는 생의 냄새입니다. 흙집 아궁이에 걸터앉은 가마솥에 평생 곰을 고은 그의 삶에서 나는 청국장 같은 냄새입니다. 그는 이 집에서 78년을 살았습니다.


너무나 가난한 아버지는 밥숟갈 하나라도 덜어보겠다고 아홉 살 어린 딸을 아랫동네 떠꺼머리에게 내쫓듯 시집보냈습니다. 가지 않으려고 울고불고 떼를 쓰는 어린 딸을 옷 보따리 하나 던져주고 눈을 부라리며 작대기로 위협하며 시집보냈습니다. 아버지에게 쫓겨 울면서 눈발 날리는 겨울에 민며느리로 시집을 왔습니다.


두껍게 얼어버린 집 앞 도랑 얼음을 도끼로 깨고 저승같이 찬물에 빨래를 주무르다가 양말 한 짝이라도 얼음 밑으로 놓치면 부지깽이를 들고 호랭이처럼 눈을 부라리는 시어머니 밑에서 모진 세월을 살았습니다. 물 긷기, 김매기, 빨래하기, 군불 때기, 쇠죽 끓이기, 마당 쓸기, 타작하기 같은 것들을 어린아이 때부터 굳은살이 박이도록 했습니다.


팔십리 장에 갔다가 소금 두 말 머리에 이고 집에 오는데, 시어머니는 한 번도 쉬어가자 소리도 않고 짐을 나눠 질 생각도 없이 앞장서서 집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장거리에 널린 그 흔한 국밥 한 그릇도 못 먹고 어린 계집아이가 빈속으로 팔십 리 길을 소금 두 말 머리에 이고 속울음으로 징징거리면서 걸어왔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살았습니다. 꽃이 피면 봄이 오는구나, 낙엽이 지면 가을이 오는구나 했지 어느 것 하나 자신을 돌아볼 여력도 없이 살았습니다. 시부모 봉양에 남편 모시기에 자식 낳아 기르기까지 숨 한 번 제대로 쉬어볼 새가 없었습니다. 이 모두를 오지랖으로 쓸어 담아 가마솥 같이 웅숭깊게 고아냈습니다.


지금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는 휘어지고 비틀려 있습니다. 허리는 무너지고 무릎은 연골이 닳아 걸을 때마다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를 냅니다. 머릿결은 파뿌리가 됐지만, 영감은 벌써 가고 방바닥에 홀로 앉아 식은 밥을 먹습니다. 몸을 돌려 흙벽으로 돌아누우면 쾨쾨한 구들장 냄새가 오래된 솜이불 밖으로 스멀스멀 기어 나옵니다. 그것도 오래된 친구라서 이제는 다정하고 친근합니다.


아, 가마솥 같은 사람. 한 세월 모든 걸 품고 곰국을 고듯이 장작불을 지핀 사람. 나는 그를 지긋이 안으며 인간의 냄새를 맡습니다. 뼈가 닳도록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버리지 못할 게 이 세상에 있어 그것을 마지막까지 품고 살아온 사람, 그 사람에게 깊은 인간의 냄새를 맡습니다. 당신에게서 사람의 향기가 납니다. 참 고맙습니다.


김선주 <영동 물한계곡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