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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230] 남자들의 수다

바람아님 2013. 9. 10. 08:49

(출처-조선일보 2013. 09. 10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수다는 원래 여성의 영역이었다. 인간은 존재의 역사 25만년 중 첫 24만년 동안 이른바 수렵채집 생활을 하며 살았다. 수렵 즉 사냥은 근육의 힘이 필요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남성들이 맡게 됐다. 사냥이란 게 낚시만 해봐도 알지만 날이면 날마다 잡히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허구한 날 빈손으로 돌아올지 모르는 남정네들을 생각하며 여성들은 집 주변에서 견과류와 채소를 채집해 안정적으로 저녁상을 차렸던 것이다.

수렵은 다분히 목표 지향적인 행위이다. 사슴을 사냥하려면 바다로 갈 게 아니라 사슴들이 출몰하는 초원으로 가야 한다. 운 좋게 사슴 한 마리를 잡으면 그 무거운 걸 둘러메고 객쩍게 이리저리 돌아다닐 게 아니라 곧바로 귀가해 고기를 다듬어야 한다. 반면 여성들이 너무 목표 지향적으로 행동하면 곤란하다. 냉이 캐러 나간 아낙네가 냉이만 달랑 캐서 돌아오면 그날 저녁엔 냉이만 먹어야 한다. 그래서 여성들은 대개 냉이 한 바구니를 옆에 낀 채 마을을 한 바퀴 돌고 귀가한다. 마을을 돌며 동네 아낙네들을 만나면 질펀하게 수다를 떤다. 수다는 흔히 쓸데없는 말이라 여기지만, 여성들은 언뜻 쓸데없어 보이는 수다를 통해 정보를 교환한다. 달래, 냉이, 씀바귀가 늘 동일한 시기와 장소에 나타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채집에는 정보의 수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동물을 사냥하던 남자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했지만 식물을 채집하던 여성들은 늘 재잘재잘 수다를 떨었다.

최근 랩 음악과 SNS가 등장하며 남자들의 수다가 엄청나게 늘었다. 예전에는 술잔을 돌려야 군대나 정치 얘기로 나름 수다를 떨던 남자들이 요즘엔 떼로 몰려나와 수다를 떠는 TV 프로그램에서도 여성들에게 결코 밀리지 않는다. 래퍼도 여성에 비해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남자들이 원래부터 수다를 못 떠는 동물은 아니었나 보다. 그저 수다를 떨 기회가 없었던 모양이다. 지금도 전화 통화는 여성들이 훨씬 더 길게 하는 것 같은데, 과연 SNS 공간에서도 여성이 남성보다 더 수다스러운지 연구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