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09.12.21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나는 그동안 주로 '개미박사'나 '생태학자'로 불렸는데 최근에는 종종 '통섭학자'라고 소개된다.
내가 몇 년 전 우리 사회에 화두로 던진 통섭(統攝)은 어느덧 지하철에서도 들을 수 있는 일상용어가 되었다.
통섭이 등장하자 기존에 우리가 사용하던 통합이나 융합과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이 이어졌는데,
고맙게도 2005년 서울대학교 개교 6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모인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마치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를 만들듯 다음과 같이 정리해주었다.
통합은 둘 이상을 하나로 모아 다스린다는 뜻으로 다분히 이질적인 것들을 물리적으로 합치는 과정이다.
전쟁 때 여러 나라의 군대를 하나의 사령부 아래 묶어 연합군 또는 통합군을 만들어보지만 병사들 간의 완벽한 소통은
기대하기 어렵다. 통합보다 더 강한 단계가 통폐합인데 껄끄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융합은 핵융합이나 세포융합에서 보듯이 아예 둘 이상이 녹아서 하나가 되는 걸 의미한다.
통합이 물리적인 합침이라면 융합은 다분히 화학적 합침이다.
이와 달리 통섭은 생물학적 합침이다.
합침으로부터 뭔가 새로운 주체가 탄생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남남으로 만난 부부가 서로 몸을 섞으면 전혀 새로운 유전자 조합을 지닌 자식이 태어나는 과정과 흡사하다.
나이가 조금 지긋한 이들은 학창시절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를 외던 기억이 날 것이다.
프로스트가 쓴 또 다른 시 '담을 고치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좋은 담이 좋은 이웃을 만든다."
담이 없으면 이웃이 아니라 한집안이다. 한집안이라고 해서 늘 화목한 것은 아니다.
학문의 구분과 사회의 경계는 나름대로 다 필요한 것이다. 다만 지금처럼 담이 너무 높으면 소통이 불가능하다.
통섭은 서로의 주체는 인정하되 담을 충분히 낮춰 소통을 원활하게 만들려는 노력이다.
통합이든, 융합이든, 통섭이든 우리가 원하는 것은 서로 어울려 갈등을 없애고 화목해지는 것이다.
소통은 세 가지 덕목을 필요로 한다. 비움, 귀 기울임, 그리고 받아들임이다.
결론을 손에 쥐고 남을 설득하려 들면, 그건 통치 또는 통제에 가깝다. 우선 나를 비워야 한다.
그리고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좋은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 유난히도 소통이 아쉬웠던 한 해가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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