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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그 사람들]조헌, 나라를 구하고자 분전한 '행동하는 선비'

바람아님 2017. 6. 5. 08:54
아시아경제 2017.06.04. 08:00
의병장 조헌 표준영정(사진=위키피디아)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에 위치한 칠백의총(七百義塚)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맞서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700명의 의병을 기리기 위해 조선 인조 때 세운 무덤이다. 이 700명의 용사를 이끌었던 의병장이 임진왜란 당시는 물론 그 전부터 강경파 선비로 이름을 날렸던 조헌(趙憲)이다.


조헌은 전쟁 전에 송강 정철과 함께 서인 강경파로 이름이 높았던 인물이었다. 서인 내에서도 동인과의 주전론에 중심에 섰던 인물로 당시 임금인 선조도 "서인들 중에서도 간귀"라 평할 정도였다고 한다. 상소를 올리때는 도끼를 함께 가져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목을 치라며 항의했다.


이후 도끼를 가져가서 항의하는 상소를 '지부상소'(持斧上疏)'라 부르게 됐으며 후대 양반, 유생들의 본보기가 되기도 했다. 구한말 의병장이자 위정척사파의 대표주자인 최익현도 이 지부상소를 올렸던 일로 유명하다.


이런 성정이다보니 모략이 판치던 선조시대 조선 조정에서는 좀처럼 살아남기 힘든 성격이었다. 유배와 복귀를 반복하는 굴곡진 관료생활을 이어나갔으며 임진왜란이 가까워오자 지방관을 하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서 전쟁에 대비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연안성을 지키던 신각 장군이 그의 생각이 옳다 여겨 성을 정비했고, 임진왜란 이후 임진강 어귀에서 왜군을 처음으로 물리친 귀한 승리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임진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 한달도 채 되지 않아 한양이 함락되자 조헌은 본격적으로 의병을 모집해 전선에 뛰어들었다. 옥천에서 거병한 조헌은 격문을 쓰고 주변 문인들의 도움을 받아 1600명 정도의 의병을 모았으며 이후 관군과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병과 합세해 청주성 탈환에 나서 성공했다.


이후 당시 전라도로 진격 중이던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왜군 1만5000명과 맞서 금산전투에서 분전했다. 중과부적의 싸움이라 비록 전멸하긴 했으나 당시 왜군의 전략을 크게 뒤바꾸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금산전투 외에도 웅치, 이치 전투에서 잇따라 병력 손실이 커진 왜군 제 6군은 전라도 진격을 포기하게 됐으며 전라도가 실함을 면하면서 조선군은 전쟁을 지속할 군량 기반을 지키게 됐다.


전투 후에 아들과 함께 장렬히 전사한 조헌을 비롯해 700명의 용사의 유골은 큰 무덤에 합장됐으며 이것이 오늘날 칠백의총이 됐다. 조정에서는 조헌에게 사후 이조판서를 추증했고 인조 때는 종용사(從容祠)를 지어 그의 위패를 모셨다. 1940년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만행으로 한번 파괴됐었지만 광복 후인 1963년 복원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