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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환의 시간여행] [73] '남녀 함께 수영', 풍기문란으로 단속.. 안심하고 노는 '여학생 수영장' 등장

바람아님 2017. 6. 8. 10:19
조선일보 2017.06.07. 03:09

1935년 9월 "경성(서울) 한강로 철도수영장에 남녀들이 복잡하게 모여들어 풍기(風紀)가 문란하다"는 정보에 따라 경찰이 단속에 나섰다. 문제가 된 건 '수영장의 남녀 혼욕'이었다(동아일보 1935년 9월 1일 자). 남녀가 한 물에서 수영하는 것을 풍기 문란으로 취급했다. 남녀칠세부동석 관념이 아직 남아 있었는데, 벗은 여자들이 남자들과 섞여 물놀이한다는 건 용납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1920년대 경성에선 영화관 좌석도 남녀석이 구분돼 있었다.


1920년대 신문 보도에 따르면 당시 일부 해수욕장도 남녀의 구역을 나눠 놓았다. 도시의 수영장 중엔 중간에 밧줄을 친 뒤 한쪽을 여성 전용 구역으로 정한 곳들이 있었다. 1935년 경성운동장(지금은 사라진 동대문운동장) 안에 설치된 수영장은 매주 월요일마다 여성들만 입장하게 했다. 이런 공간이라도 없으면 당시 여성은 물놀이하기가 쉽지 않았던 듯하다. 1930년대엔 여름이 되면 남자들은 강변·해변에서 피서를 했지만, 여자들은 대개 골방에서 종일 땀을 흘리며 지내는 게 보통이었다(조선일보 1933년 7월 29일 자).


1958년 뚝섬에 마련된‘여학생 전용 수영장’은 매년 여름 한 달씩 개장했다. 1962년 여름 이 금남(禁男)의 수영장에서 노는 여학생들 모습을 전한 기사(경향신문 1962년 8월 14일 자).

여성만 수영하는 공간은 광복 후에도 운영됐다. 1958년 7월엔 여학생들만 이용할 수 있는 '여학생 수영장'이 서울 뚝섬에 개장했다. 서울시교육위원회가 마련한 시설이었다. 개장식엔 문교부 차관, 서울시장, 서울시교육감 등이 참석해 테이프를 끊었다. 1972년엔 대학생들 MT의 메카로 유명한 경기도 가평군 대성리에도 1200명이 이용할 수 있는 여학생 전용 풀장이 선보였다. 1960년대에 경찰은 여름이 되면 "수영장은 남녀의 장소를 가급적 구분토록 한다"는 내용을 치안 대책의 하나로 발표했다. 


수영장을 남탕, 여탕 나누듯 칸막이한 이유를 당국은 풍기 문란 때문이라고 했다. 대체 어떤 행동이 문제였을까. 1954년 신문기사에선 수영장의 대표적 추태로 '남녀가 쌍쌍이 되어 파라솔 그늘 속에 숨어 눕고, 온종일 수영도 일광욕도 아닌 남녀 학생의 교제만을 일삼는 행위'를 꼽았다. 서울시교위가 1958년 거론한 수영장의 풍기 문란 행위는 '수영을 가르친다며 남녀가 난잡하게 접촉하고 남학생이 여학생을 희롱하는 것'이었다. 서울시교위는 '차마 볼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면서 수영장마다 학생 풍기 단속 감독자를 주재시키고 여학생 수영장도 만들었다.


하지만 뜻밖의 부작용도 있었다. 여학생들만 한곳에 몰아넣다 보니 도리어 남자들 시선을 더 집중시켰다. 짓궂은 남학생들이 여학생 수영장을 기웃거리고 여학생을 희롱했다. 1962년엔 한밤 뚝섬 여학생 수영장에 남자가 침입했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여학생들이 마음 놓고 수영하라며 만든 시설이 정말로 완전히 마음 놓을 곳이 되지는 못했다. 결국 금남(禁男)의 수영 공간은 슬며시 사라져 갔다.


오늘날 수영장에선 몰래카메라 촬영 같은, 여성에 대한 신종 범죄까지 횡행하지만 "여자들끼리 수영하게 해 달라"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많은 여성이 굳이 보호막 뒤에 숨으려 하지 않는다. 1994년 미국 뉴욕 시립 수영장에서 여성들의 성추행 피해가 잇따르자 시 당국이 남녀 수영 공간 분리를 검토했을 때, 상당수 여성이 제기했던 반대론이 음미할 만하다. 그녀들은 이렇게 말했다. "여자들끼리 무슨 재미로 수영을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