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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에서-남혁상] 재앙, 반복하지 않으려면

바람아님 2017. 6. 12. 09:53
국민일보 2017.06.11. 17:29

2001년 3월 초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 워싱턴의 백악관에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마주 앉았다. 부시 대통령이 취임한 지 불과 두 달도 되지 않은 시기였다. 김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부시 대통령에게 햇볕정책 기조를 설명했다. 북한 지도자 김정일 국방위원장 역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설득했다. 김 대통령 말을 한참 듣던 부시 대통령이 중간에 말을 끊었다. 그리곤 이렇게 물었다. “대통령님, 정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뜻밖의 질문에 김 대통령이 잠시 머뭇거리자 부시 대통령은 “정치라는 게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북한 지도자는 그렇게 하고 있나요?”라고 다시 물었다. 이어 자신은 북한 지도자의 변화를 기대하지 않고 있다고 단언했다. 곧바로 면박을 준 셈이다. 당시 공개되진 않았지만 한·미 정상회담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회담 이후 공동기자회견이 이어졌다. 부시 대통령은 김 대통령을 바로 옆에 두고 이렇게 얘기했다. “나는 북한 지도자에게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북한이 모든 합의를 준수하는지 확신이 없습니다.” 김 대통령의 장시간 설득이 헛수고가 된 순간이었다. 그는 또 팔순이 가까운 김 대통령을 가리켜 “디스 맨(this man·이 사람)”이라고 불렀다. 김 대통령은 훗날 자서전에서 “매우 불쾌했다”고 썼다.


한국의 진보 대통령과 미국의 보수 대통령이 사상 첫 정상회담을 가진 그날은 한·미 외교사에서 ‘재앙’ 또는 ‘악몽’으로 불린다. 실패한 정상회담의 전형으로도 여겨진다. 설익은 자신감과 준비 부족, 상대에 대한 이해 결핍이 어우러진 참사였다.

왜 그랬을까. 당시 김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을 급하게 추진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김 대통령은 북·미 고위급 대화 분위기가 익어가던 빌 클린턴 정부의 대북 접근법이 부시 행정부에서도 계속되길 원했다. 부랴부랴 회담을 타진한 것도 새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가 완성되기 전 우리 입장을 적극 반영해야 한다는 다급함 때문이었다. 


여기에 불과 몇 개월 전의 첫 남북정상회담, 노벨 평화상 수상 등에 따른 김 대통령의 자신감도 한몫했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에 대한 본질적 이해 없이 햇볕정책의 효용성 설파에만 집중됐던 회담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한·미 양국은 북한 문제를 놓고 한동안 불편한 관계를 이어갔다.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첫 정상회담을 앞둔 지금은 그 당시와 별반 다르지 않다. 오히려 북핵·미사일 위협이 한층 고도화되는 등 주변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이번 정상회담은 어쩌면 2001년 3월보다 더 어렵고 힘들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정부의 외교부 장관 후보자는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고, 외교안보수석 역할을 하는 국가안보실 2차장은 공석이다. 국가안보실장도 통상 전문가에 가깝다. 정상회담은 치밀한 정지작업과 준비, 철저한 논리가 선행돼야 한다. 외교안보 진용도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뤄질 첫 정상회담이 걱정스러운 이유다.


특히 이번 정상회담의 성공을 담보하기 어렵게 하는 건 사드(THAAD) 문제다. 한·미동맹의 근간은 안보다. 이는 협상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한다. 우리 정부가 사드에 대해 수차례 “철회는 아니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미국 정부의 속내는 떨떠름하다. “이해하고 신뢰한다”는 미국 정부의 말이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무엇보다 양국의 신뢰를 회복하는 게 급선무다. 의구심과 불신이 기저에 깔린 상황에선 민감한 현안에 대한 구체적인 해법 도출은 불가능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철저한 비즈니스맨이다. 그런 그를 상대하기 위해선 접근법도 달라야 한다. 일단 신뢰를 심어주는 게 필요하다. ‘재앙’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커다란 명분보다 실리를 먼저 찾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남혁상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