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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칼럼] '수학'이 다스리는 나라 대한민국

바람아님 2017. 6. 25. 08:50
중앙일보 2017.06.24. 02:02

한국에서 가치를 매기는 것은 숫자
인간 체험을 순위로 평가하면 '폭력'
부패 막으려 수치가 필요했겠지만
이제 '뉘앙스' 있는 평가 방식 필요
임마누엘 패스트라이쉬경희대 국제대학 교수
나는 우리 학생들이 미래를 걱정하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몹시 가슴 아프다. 나를 안타깝게 만드는 것은 단지 그들이 좋은 일자리에 취업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확실성만은 아니다. 학생들은 일상의 표면 아래에 감춰진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끊임없이 솟구쳐 올라와 그들의 발목을 붙잡는다고 느낀다. 한국 사회는 그들 모두가 인간으로서 본질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다.

한국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일단 숫자로 변환된다. 숫자로 순위를 매긴 다음에야 어떤 일의 가치가 인정받게 된다.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게 마치 위반하면 안 되는 법칙처럼 돼 버렸다. 한데 랭킹은 우리의 일상적 체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어떤 객관적인 기준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만 한다.


숫자가 다스리는 나라인 한국에서 사는 우리는 사람들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에 그들이 주변 사람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그들이 일상적인 활동을 통해 우리의 문화와 조직에 어떻게 공헌하는지를 고려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수학적인 방정식을 동원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한다. 예컨대 우리는 ‘몇 개의 IT 기기를 팔았는가’ ‘사회과학논문인용색인(SSCI) 논문을 몇 편이나 썼는가’ ‘몇 대의 자동차를 점검했는가’와 같은 질문을 한다.


수학은 한국에서 가치를 매기는 최종적 결정권자가 됐다. 그 어떤 공헌도 양적으로 가늠할 수 없으면 인정되지 않는다. 나는 우리 학생들이 혼란스러워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한국 사회에 내재돼 있는 끔찍한 ‘폭력’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다. 지극히 복합적인 인간의 체험, 식구들이나 공동체 혹은 자연 세계와 ‘나’라는 개인 사이에 벌어지는 본질적으로 미묘하면서도 다차원적인 상호작용이 끊임없이 랭킹으로 단순화돼 표현된다. 랭킹이라는 단일한 숫자는 어떤 개인이나 조직, 심지어 나라 전체의 가치를 표시한다.


이처럼 인위적인 방식으로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가치를 수리적으로 바꿔놓으려는 욕구의 원천은 무엇일까. 한국인들이 다른 한국인을 판단하도록 내버려두면, 필연적으로 부패가 끼어든다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부패를 차단하려면 수학적인 평가라는 보다 객관적인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 체험에 대한 이러한 2차원적인 접근법은 인간 체험을 ‘평준화’시켜 버린다. 그 결과 우리에게는 공허함이 남는다.

교수로서 나는 교수진에 대한 평가가 좁은 범위의 학술지에 몇 개의 논문을 냈느냐로 평가된다는 사실이 놀랍다. 교수들이 쓰는 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전혀 평가하지 않는다. 그들이 멘토·동료·시민·작가 혹은 철학자로서 어떤 일을 하는지는 관심 밖이다. 몇 편의 학술지 논문을 썼는지는 컴퓨터로 쉽게 셀 수 있다. 하지만 글을 포함해 어떤 교수가 하는 일들의 중요성과 의미를 평가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 일들에 대해 깊은 이해가 있는 사람들뿐이다.

우리 학생들이 처한 상황은 훨씬 나쁘다. 그들의 복합적인 개인 체험은 일자리에 지원하는 과정에서 ‘스펙(specs)’이라는 묶음으로 변환된다. 마늘이 마늘 으깨는 기구에 겪게 될 운명이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다. 비극은 단지 학생들에게 돌아갈 일자리 수가 충분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젊은이들을 저마다의 존재 자체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게 더 큰 비극이다. 그들이 척도에서 차지하는 숫자를 묻는 게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당신에게는 어떤 것들이 근본적인 가치입니까’를 물어야 한다.


사람의 가치를 이해하는 복합적이고 뉘앙스가 있는 방식을 찾아내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사람을 화폐 단위로 정의하지 않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모든 사람의 체험과 공헌을 온전히 평가하려면 사람들 사이에 장기적인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인식론적 질서에서 꼭대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경제다. 경제는 그저 국내총생산(GDP)이나 이자율이나 수출 같은 숫자로 정의될 뿐이다. 그다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기술이다. 하지만 기술의 중요성을 보여줄 때 우리가 사용하는 것은 매출이나 이윤이다. 역시 숫자다. 기술이 사회에 실제로 미치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영향은 중시되지 않는다.


문화는 ‘질서 더미’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문화는 개인의 삶을 풍부하게 하는 활동이나 주말에 긴장을 푸는 휴식 정도로 인식된다. 문화는 우리를 궁극적으로 정의한다. 문화는 우리의 가치를 설정하며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가 통계에 집중하면서 미묘하거나 섬세하거나 어떤 때에는 모호하기까지 한 문화의 본질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더 빨리 갈 수는 있겠지만 우리의 진로의 대한 통제력은 상실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왜 거기로 가는지도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임마누엘 패스트라이쉬 경희대 국제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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