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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호주인 매혜란이 수원 화성의 폐허를 찍은 뜻

바람아님 2017. 6. 23. 12:54
조선일보 2017.06.22. 03:11

호주인 아버지와 두 딸.. 세 부녀 한국식 이름 짓고
日帝 강점기부터 70년간 부산서 代 이어 의료 봉사
맏딸 매혜란, 사진가 활동도.. 戰禍 입은 수원 화성 찍어
김인규 경기대 총장

수원시가 자랑하는 대표적 문화유산이 화성(華城)이다. 화성은 조선조 정조대왕이 뒤주에서 불운하게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墓)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축성한 효성(孝誠)이 깃든 성(城)이다.


이런 역사적, 철학적 가치를 지닌 수원 화성과 관련해 6·25 전쟁 발발 67주년을 앞두고 모든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 싶은 사진이 두 장 있다. 바로 6·25 전쟁 당시 두 차례 점령당한 수원시의 화성이 참혹하게 파손된 역사적 사진이다. 한 장은 화성 안에서 촬영한 장안문(長安門)이고, 나머지 한 장은 화성 밖에서 바라본 장안문의 모습이다. 장안문 옹성 앞에는 소련제 T-34 전차가 을씨년스럽게 버려져 있다. 1950년 7월 4일 북한 인민군에 의해 처음으로 수원시가 점령당했고 1952년 1월에는 중공군에 의해 두 번째로 점령당했는데, 두 사진을 촬영한 시기는 미군 25사단이 중공군을 물리치고 수원시를 재탈환한 1952년 봄으로 확인됐다.


수원 화성이 6·25 전쟁 중 포격으로 대부분 파손된 시점이 북한군의 1차 수원 점령 때인지 중공군의 2차 수원 점령 때인지 불분명하지만, 북한군에 의한 1차 점령 때인 개전 초기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군사전문가들은 "북한군이 남침하면서 앞세웠던 가공할 만한 소련제 T-34 탱크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낙동강까지 밀렸지만, 미군이 3.5 인치 로켓포를 긴급히 공수해 옴으로써 전차방어 수단이 확보되면서 반격이 가능했다"면서, 이때 북한군이 파손된 탱크를 화성 바로 앞에 그대로 버리고 퇴각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역사 전문가들은 6·25 전쟁 관련 사진 가운데, 수원 화성의 참상을 이처럼 생생하게 담은 사진은 흔치 않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두 장의 사진은 전쟁 중에 누가 촬영한 것일까? 그 해답은 현재 수원에 자리 잡은 경기대학교 박물관에 전시 중인 '호주 매씨 가족의 한국 소풍 이야기'라는 사진전에서 찾을 수 있다.

6·25 전쟁 중이던 1952년 파괴된 수원 화성 장안문의 모습과 소련제 T-34 전차(사진 위). 아래는 성 안쪽에서 본 장안문의 당시 모습.

1910년 일제 강점기에 호주 선교사인 제임스 노블 매켄지(James Noble Mackenzie·1865~1956)가 선교활동 차 한국으로 파송되어 매견시(梅見施)라는 한국이름으로 '부산 나병원'을 28년간 운영하며 나환자들을 돌봤다. 그가 부산에서 환자들을 돌볼 때 태어난 두 딸 헬렌(Helen· 1913~2009·한국명 매혜란)과 캐서린(Catherine·1915~2005·한국명 매혜영)은 호주에서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을 졸업한 뒤 1952년 전쟁 중인 한국에 돌아와 부산에서 '일신부인병원(현재 일신기독병원)'을 설립하고 대를 이어 의료봉사활동을 펼쳤다.


매견시는 취미로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그의 큰딸 매혜란도 아버지의 취미활동을 이어받아 사진작가로도 활동했다. 매혜란은 중공군이 퇴각한 후인 1952년 3월부터 5월까지 석 달 동안 거제도를 시작으로 공주, 전주, 수원, 서울 등지를 돌아다니며 6·25 전쟁의 참상을 촬영했는데, 수원 화성이 파괴된 이 역사적인 모습도 그때 카메라에 담은 것이다.

6·25 전쟁으로 대부분이 파손되고 주요 뼈대만 남았던 수원 화성은 1975년부터 5년 동안 화성 축성의 상세한 기록물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의거해 원래 모습으로 생생하게 복원되었다. 그 결과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지금도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전 세계에 자랑하고 있다.


매견시 집안은 일제 강점에 이어 동족상잔의 엄청난 고통을 겪은 한국인들을 대를 이어 무려 70년 동안 묵묵히 보살피고, 수천 장에 달하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 소중한 사진과 필름까지 남겨주고 모두 저세상으로 떠났다. 6월 25일을 목전에 두고 다시 한번 진심을 담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김인규 경기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