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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아뇨. 죄송합니다. 그건 좀 어렵겠어요.

바람아님 2017. 8. 19. 10:48

(조선일보 2017.08.19 이주윤 작가)


[이주윤의 너희가 솔로를 아느냐]


시답잖은 모임 하느니 TV나 보는게 낫지… 중간에 일어선다니깐 "음, 노처녀 히스테리"

하지만 세상 살아보니 남보다는 내가 더 중요… 싫은 건 싫다고 해야지


[Why] 아뇨. 죄송합니다. 그건 좀 어렵겠어요.일러스트= 이주윤


나가기 싫은 모임에 억지로 끌려나갔다. 모임 주최자가 저와 나의 관계를 들먹이며

"이번에도 안 나오면 어쩌고저쩌고 씨부렁씨부렁" 으름장을 놓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주고받는 사람들 틈에 

허수아비처럼 끼어 앉아 생각했다. 

'이건 인생의 낭비야'라고. 만약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더라면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무한도전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럼 스트레스도 풀리고 체력도 보충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얻은 힘을 발판 삼아 더욱 적극적으로 빈둥댈 수 있었을 텐데. 

여러모로 짜증이 났다. 

이런 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이미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므로 

눈치 빠른 몇몇은 나의 속내를 읽어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저기… 미안한데 갑자기 급한 일이 좀 생겨서…." 뻔한 핑계를 대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를 누구도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절친한 친구를 만나 푸념을 늘어놓았다. 

"나 진짜 왜 이러는지 몰라. 예전에는 다른 사람 기분 생각해서 어지간하면 다 맞춰주고 그랬는데 이제 그게 잘 안 돼. 

남의 비위 맞추려고 하다 보면 내 비위가 상해서 얼굴이 막 썩는다니까?" 

그녀는 무언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 드디어 그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군." 

나는 속 시원한 해답을 기대했으나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나를 분노케 했다. 

"사람들이 너 노처녀 히스테리 부린다고 안 그러디?" 

노처녀라는 단어만 해도 끔찍한데 거기에 히스테리까지 따라붙다니. 

나는 도끼눈을 뜨고서 그녀에게 덤벼들었다. 

"야, 나만 노처녀냐? 너도 노처녀야! 이러는 내가 노처녀 히스테리면 너도 마찬가지라 이 말이야!" 

그녀는 길길이 날뛰는 나를 바라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맞아, 나 그 소리 들은 지 꽤 됐어."


그녀의 말은 이러했다. 

우리가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적에는 싫어도 싫은 티를 내지 못했다. 상대방이 언짢을까 봐. 

그런 그가 우리를 헐뜯을까 봐. 결국에 나쁜 사람으로 낙인찍힐까 봐 두려워서 말이다. 

그런데 세상을 좀 살아보니 남보다는 내가 더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다른 이의 눈치를 살피며 행동하는 대신 싫은 건 싫다고 얘기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주장하게 된 것뿐.


그런데 사람들의 눈에는 이런 우리의 모습이 결혼 못 한 노처녀가 괜한 성질을 부리는 것으로 비치는 모양이다. 

우리는 노처녀 히스테리를 부리는 게 아니다. 

그저 스스로가 원하는 바를 확실하게 밝혀도 괜찮다는 걸 이 나이가 되어서야 깨달은 것이다. 

그러니 자책할 필요 없다. 

우리는 정말 잘살고 있으니까. 순간, 내 친구가 세상에서 제일 멋진 노처녀로 보였다.


아뇨.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그건 좀 어렵겠어요. 

요즘 내가 열심히 연습하는 말이다. 

꽁하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보다는 확실하게 말로 표현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이다. 

여태껏 해본 적 없는 말이라서 그런지 영 입에 붙지를 않는다. 연습, 또 연습해야지. 

누군가는 이 글을 읽고 '자기 성질 더러운 거 합리화하고 있네. 

아줌마, 노처녀 히스테리 그만 부리고 빨리 시집이나 가세요'라고 딴죽을 걸지도 모르겠다. 

오, 드디어 연습한 걸 써먹을 때가 왔군. 

아뇨.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그건 좀 어렵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