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 작가 김지연이 모은 빛바랜 낡은 사진들 속에 이런저런 가족 이야기 듬뿍
너무 아름다워 眞價 몰랐네
올해 칠십인 사진가 김지연은 쉰을 넘어 사진을 배우고 찍었다. 자식 셋을 대학 졸업시킨 후였다. 그동안 풀지 못한 예술적 욕구를 사진으로 표현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눈에 시골 정미소가 들어왔다. 어린 시절 할머니를 따라갔던 정미소는 그녀의 추억에서 행복한 공간이었다. 먹을 것이 부족한 시절에도 정미소엔 늘 쌀이 많았고 마을 사람들은 그곳에 모여 웃으며 이야기했었다. 안도현의 시처럼 '들녘의 모든 길이 정미소로 이어지던 시절'이었다. 시간이 흘러 쌀의 생산과 유통 방식이 달라지며 정미소는 하나둘 사라져갔다.
사라지는 정미소를 안타까워하던 사진가는 3년 동안 전국 500여 정미소를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전시회를 했다. 그러다가 아예 폐업한 정미소를 하나 사서 개조해 전시관으로 꾸몄다. 전북 진안군 마령면 계서리의 마을공동체박물관인 '계남정미소'는 2006년 그렇게 문을 열었다.
그해 봄부터 정미소가 있는 진안 지역 주민들의 기록과 역사적 흔적들을 모아 전시를 시작했다. 시어머니의 보따리, 폐교를 찾아다니며 수집한 졸업사진첩, 댐 수몰지역 이주민들과 6·25 참전용사들을 만나 찍은 사진과 자료들…. 계속된 전시로 계남정미소는 세상의 주목을 받지만 아무런 지원 없이 모든 것을 혼자 하자니 너무 힘들었다. 2012년 9월 계남정미소는 결국 문을 닫았다. 그녀는 "단 한 명이라도 도와줄 사람이 있었다면 문 닫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그 계남정미소가 폐쇄 5년 만인 지난 8월 11일 그녀가 직접 기획한 전시를 하면서 다시 문을 열었다. 27일 전시회를 끝낸 김지연은 "힘들어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며 전처럼 혼자 자료를 수집하고 전시 팸플릿을 만들었다. 정미소에 가보니 녹슨 함석으로 덧댄 지붕 아래 한쪽 벽을 방치된 호박 넝쿨이 점령하고 있었다. 문 옆엔 '시절노래'라고 큼지막하게 적힌 이번 사진전 플래카드가 걸렸다. 정미소 내부엔 2층 높이의 쌀 찧던 정미기계가 그대로 있었다. 공간의 원래 용도를 그대로 보존했다. 정미소 쌀 창고로 쓰던 공간을 개조한 전시장엔 전시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진안과 전주를 10년 넘게 돌아다니며 수집한 흑백 사진들이었다. 명함처럼 작은 사진들을 스캔으로 확대해서 액자에 넣어 걸었다. 오래되어 사진이 눌어붙고 구겨지고 떨어진 모서리까지 그대로 뒀다. 세월을 버티며 살아남은 흔적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복을 입고 찍은 1940년대 결혼사진과 졸업식 사진, 돌잔치와 야유회 기념사진도 있었다. 사진 위에 흰 글씨로 투박하게 적은 단기(檀紀) 연도와 구호가 눈에 들어왔다. '도리떡의 추억'(1959년), '꽃시절에 친우를 부여잡고'(1959년)…. 사진이 귀했던 시절 사진사들은 손님이 원하는 글귀를 필름 위에 적어주기도 했다.
수집된 사진 앨범들도 진열했다. 전북 익산 왕궁면에서 태어난 77세 조귀봉씨의 앨범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사진첩에는 청춘과 꿈이 담겨 있다. 그 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었다고, 꿈결 같은 인생을 말하며 그이는 아쉬운 눈빛을 담았다." 앨범을 펼치자 검정 배지 위에 풀로 붙인 작은 흑백 사진들이 들어왔다. 언뜻 보기에 한 가족의 평범한 사진앨범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과 출산, 아이의 돌과 친구들, 양장을 입고 남편에게 반지를 받던 젊은 시절의 모습까지. 천천히 다시 보자 한 사람의 일생이 보였다. 앳된 갈래머리 소녀는 후에 결혼해 엄마가 되어 아이를 키우고, 그 아이는 자라며 입학식과 졸업식 사진을 찍었다. 그 사이 시간이 흘러 엄마는 나이를 먹고 늙어갔다.
손턴 와일더(Thornton Wilder)의 연극 '우리 읍내'에선 세상을 떠난 주인공이 행복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가 다시 저승으로 떠나며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게 그렇게 지나가는데, 그걸 몰랐던 거예요. 안녕, 이승이여, 째깍거리는 시계도, 해바라기도 잘 있어. 맛있는 음식과 커피, 새 옷도, 따뜻한 목욕탕과 잠자고 깨는 것도. 아, 너무나 아름다워 그 진가를 몰랐던 이승이여, 안녕."
가족의 이야기와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이런 앨범들은 한때 모두 버려질 뻔했다. 어르신들은 새집을 지을 때면 자식들에게 부담 주지 않으려고 오래된 사진첩들을 모두 태워버렸다. 늙은 부모의 흔적을 자식들은 싫어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상을 떠나기 전에 다시 보고 싶은 것을 우리에게 하나만 고르라면 그건 가족사진 앨범이 아닐까?
정미소를 찾은 관람객들은 사진을 보며 자기 가족의 앨범을 보듯 좋아했다. 그녀는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역사를 알려준 것이 보람"이라며 소녀처럼 웃었다. 계남정미소 외에도 김지연은 그동안 열한 번의 개인 사진전을 열었고 전주에서 서학동사진관이라는 사진 전문 갤러리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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