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뉴스와 시각>지금 권력 심장부는 건강한가

바람아님 2017. 10. 18. 09:54
국민일보 2017.10.17. 11:50


조선의 왕 광해가 재임 첫해 과거시험에서 책문(策問)을 내렸다. “나라의 위기는 어디에 있는가.” 조위한이 답했다. “도끼에 맞아 죽을 각오로 말씀드리니… 위기는 궁궐의 담장 안에 있습니다.” 재임 3년 차가 되자 광해가 또 물었다. “나라의 병은 어디에 있는가.” 이번엔 임숙영이 답했다. “나라의 병은 왕, 바로 당신에게 있습니다.”


책문은 조선조 고위공무원 선발을 위한 문과시험 마지막 관문에서 임금이 던지는 시대의 물음이다. 광해로부터 질문을 받아든 예비관료들은 임금이 마땅히 해야 할 일들로 자기 수양(修身), 공정한 인사(任將·用人), 권력남용 통제(禮治), 소통과 언로 개방(納諫), 경제 성장(中興), 튼튼한 외교·안보(復讐·練兵), 국민 통합(和合) 등을 꼽았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광해의 독선과 무능을 지적했다. 400년이나 흐른 지금도 시대의 물음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17년 나라의 위기는 이렇다. 권력의 오만, 코드 인사, 권력 강화, 여론 장악, 성장 없는 경제, 외교 고립과 안보 위기, 국론 분열.


문재인 정권의 도덕적 우월성에 대한 확신과 이에 토대한 권력의 오만은 위기의 근원이다. 오만은 코드 인사를 낳고 코드화한 조직을 양산한다.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체제’를 유지하겠다는 태도는 3권분립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기록될 것이다. 대통령 특보와 직속 위원회 같은 옥상옥 기구를 통해 권력을 강화하고 ‘패놉티콘’ 같은 관료 감시체제를 만든 것은 권력의 자기통제에 반한다. 우호 집단을 활용한 여론 장악 시도는 다양한 언로의 차단 및 민주주의 후퇴와 맞닿아 있다. 소득주도성장론은 성장 없는 경제라는 혹독한 결과를 불러왔고, 최저임금 대폭 인상 같은 인기영합적 시책은 오히려 근로자들을 힘들게 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외교·안보 분야에서의 무능과 혼선은 ‘코리아 패싱’과 안보 위기를 자초했고, 청와대가 중심이 된 전 정권 비리 의혹 기획 폭로는 국민통합이 아니라 국론 분열을 초래하고 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임금의 잘못이 국가의 병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라며 답안 작성을 마친 임숙영에 격노한 광해가 ‘삭과’(과거 급제 박탈)를 지시했지만, 이덕형·이항복 등 중신들이 “임숙영의 대책은 정당한 주장”이라며 임금을 말렸다. 삼사(三司)와 유림과 각급 언론이 군주의 독선과 무능, 측근의 전횡을 성토하는 간쟁(諫爭)을 하고 상소를 올렸다. 4개월 후 광해는 삭과 지시를 거뒀다.


임금이 위약(危弱)해도 공직사회가 건강하면 국정은 유지될 수 있다. 거꾸로 공직사회가 무기력해도 임금이 유능하면 문제 해결을 도모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궁궐 담장 안 풍경으로는 이를 기대하기 힘들 것 같다. 대통령이 지지율에 취해 겉만 번지르르한 시책을 남발하고 대통령 비서실장이 전 정권의 캐비닛 대방출에 혈안이 돼 있고, 여권 전체가 과거와의 전쟁에만 매달리는 식이라면 이 나라에 희망이 없다. 지금 “나라의 위기는 어디에서 오는가”라 묻고 “위기는 바로 대통령, 당신에게 있다”고 답하는 책문이 오가야 할 때다. 그러지 않으면 4년 6개월 후 또다시 ‘적폐를 불사르자’는 성마른 구호가 사방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

mins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