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믿음
얼마 전에 『행복수업』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부부간 또는 사람 사이에 좋은 인연으로 맺어졌지만, 살면서 가까운 사람들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그것마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소중한 인생의 관계성이 쉽게 깨어진다는 내용이었다.
한 5년 전쯤 이야기인 것 같다. 그땐 사람들이 소통이란 주제를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소통을 하자고 그렇게 서로 떠들어 대면서도, “나는 소통이 잘 되는 사람이고 당신은 소통이 안 된다”는 말을 서로 했다. 그러다가 결국 소통이란 말조차도 세상에서 사라졌다. 마치 20년 전에 ‘내 탓이요’ 하고 모든 국민들이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속죄하는 모습이 생각난다.
말이나 메시지에도 유행이 있는가? 지금은 시중에 무슨 메시지가 통용(通用)되는지 잘 모르겠다. 종교인들도 정말 행복이란 단어를 함부로 쓸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그 말에 오히려 불행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요즈음은 어떤 모임자리에서도 ‘행복’, ‘마음’ 이런 말을 하면 참석자들은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떠난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가슴이 아프다.
며칠 전 장모님을 요양원에 모시는 문제에 대해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아내가 대화 중간에 말을 끊더니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다”며 식탁에서 일어났다. ‘이것이 우리집만의 이야기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 뒤로 싸늘한 집 공기를 의식하게 되었고, 마음에 쌓인 이야기를 혼자 풀 수도 없었다.
비가 내리는 토요일 오전, 수술을 한 병원 물리치료실 복도 혈압기에 혈압을 재어 보니 수치가 훨씬 올라가 있었다. 정말 스트레스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 봤다. 옆에 지켜보던 간호사가 수치를 보고 “너무 높아요…”라고 했다. 나는 아무 소리도 안 했다.
건강의 문제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서로 따뜻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내 주변에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 스스로 ‘고독증후군’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에 잠겼다. 플라타너스 무성한 잎사귀가 툭 소리를 내며 차창 앞에 떨어질 때, 가을이구나 하는 마음도 사라진 채 무심함과 쓸쓸함이 바람처럼 내 어깨에 먼저 다가서고 있었다.
최근 가까운 도반이 내게 물었다. “열반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쉽게 말했다. “열반이란 이 세상의 인연과 쉬는 것이고 자신도 마음과 육신이 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반적정(涅槃寂靜)이란 말이 있지요….” 그 사람은 내게 “열반이란 세상의 욕심과 쓸데없는 번뇌, 그런 불기운이 자연스럽게 꺼진 것이요…”라고 아주 쉽게 말했다.
‘나는 왜 이렇게 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말을 하지 못했을까’ 하는 자책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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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 박물관 학예사. 미학을 전공했으며 수행과 선그림(禪畵)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마음을 소유하지 마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