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7.12.26. 01:59
'인문학의 시대'에 박사낭인 된 인문학 전사들이 설 곳이 없다
대학 교수 정년 62세로 줄이거나 60세부터 임금피크제밖에 없다
이들의 '눈물 젖은 편지'에 대한 '눈물겨운 자구책' 외엔 길이 없다
지난주 연구실에 ‘눈물 젖은 편지’가 도착했다. 70년대식 엽서에 우표까지 붙었으니 영락없는 기억의 환생이었다. 기억은 묻어둬야 제 맛이다. 게다가 270원짜리 엽서 두 장을 스테이플로 꾹꾹 찍어 겹친 그것을 뜯어볼 호기심은 발동하지 않았다. 발신인도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그냥 ‘중앙일보 애독자 드림’이었다. 그런데 애환이 묻은 글씨체가 마음을 움직였다. 김장하면서 잠시 짬을 내 소금기에 전 손으로 쓴 것 같은 중년 아낙의 편지였다. 정말 ‘눈물 젖은 편지’였다.
이렇게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남다르게 전교 1등 하던 자식, 성실하고 책임감 강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요즘은 부모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식이 되어 있습니다.’ 울면서 쓴 편지였다. ‘공부를 조금 못했더라면 그 길로 가지 않았을 텐데, 어린 시절부터 책을 덜 읽었더라면 인문학을 선택하지 않았을 텐데, 목이 메고 눈물이 납니다.’ 수신인인 나도 급 목이 멨다. 나이 먹은 대학원 학생들이 생각났다. ‘국립대 객원교수, 시간강사 하다 240만원 월급으로 삽니다. 그것마저 끊긴다고 합니다. 자식들이 십시일반 보태주고 나도 생활비 아껴 보태면서 근근이 살고 있습니다.’
한 달 전 쓴 칼럼 ‘박사 낭인(浪人)’에 대한 그 답신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교수님은 그 사정을 알고 계시는군요. 그것만이라도 고맙고 감사합니다.’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발신인은 그저 김장을 담글 뿐이었을 것이다. 거리 시위대처럼 피켓을 들 용기도, 민원을 들이밀 창구도 없는 부모의 심정이 마지막 글귀, ‘고맙습니다’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젊은 시절 인문학에 인생을 실었던 청년 학자들은 시들어 가고, 노년을 코앞에 둔 그들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밭은 까맣게 타들어간다. 소위 ‘인문학의 시대’에 인문학 전사(戰士)들은 무기를 버리고 전업을 궁리하거나 아예 청빈낙도의 허름한 골방으로 망명 중이다. 진지하고 화려했던 청년시절을 ‘눈물 젖은 편지’로 갈무리하고 말이다.
알아서 해라? 그러면 인문학은 소멸한다. 4차 산업혁명은 인문학으로부터 발원한다고 아무리 외쳐봐야 당장 돈이 안 되는 인문학 지식과 그 생산자들을 소중하게 여길 리 만무하다. 감히 단언하건대, 스토리텔링이 결여된 첨단과학은 단명하거나 곧 사장된다. 인공지능(AI)이, 로봇이, 빅데이터가 어디 과학기술로만 똘똘 뭉쳐 있는가? 로봇시대의 상상력 지평을 열었던 스필버그 감독이 공학박사였던가? 저커버그가 네트워크라는 관계적 특성을 간파하지 못했더라면 페이스북 소통혁명은 불가능했다. 빅데이터를 만들고 분석하는 일은 공학도의 몫이고, 스토리를 입히고 응용하는 일은 인문학도 영역이다. 조선 이래 한국은 한자문명권에 지식을 생산 공급하는 중심 기지였다. 한 조각 쓸모없는 몽상(夢想)이 세상을 천지개벽할 창의(創意)가 되는 시대에 한국의 상상력 기동대는 시들어간다.
그렇게 외쳐도 대책은 없다. 대학교수들이 일찍 물러날 수밖에는. 원로교수의 원성이 왕왕 들리지만 할 수 없다. 대학 교수 62세 정년, 아니면, 60세부터 임금피크제가 답이다. 대신 연금을 조금 낮춰 앞당겨 시행하면 된다. ‘눈물 젖은 편지’에 대한 ‘눈물겨운 자구책’이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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