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8.01.09. 01:41
결국 전투적 노동운동만 기승
어떻게 그들 버렸는지 반성하며
새해 벽두 장인의 꿈 떠올린다
전공에 통달한 사람이 장인(匠人)인데, ‘장인의 꿈’이 아쉬워지는 것은 황금개띠 해 때문만은 아니다. 장인을 홀대해 온 한국의 풍조가 걱정된 탓이다. 삼십 년 전 을지로엔 인쇄소가 성업이었다. 인쇄출판 장인이 가득했다. 청계천엔 공구상, 세운상가에는 전파상이 모였다. 소목쟁이, 갖바치 등 쟁이 천국이었다. 이들이 소멸된 것을 생산기술의 발달로만 설명할 수 없다. 기술로 인간을 재빨리 대체해 버린 한국적 습성의 책임이 크다.
한 수 위 기술대국 일본은 대체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았다. 1990년대, 교토 중심가 술집에서 깜짝 놀란 일이 있다. 한국에선 이미 퇴물이 된 전기곤로를 여전히 썼고, 60년대식 선풍기와 라디오가 훌륭한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지금도 400년 전통 재래시장엔 별별 장인이 그득하다. 사케 장인, 오뎅 장인, 과자 장인, 스시 장인 등 장인이 하도 많아 시시할 정도다. 장기에 대한 집착 열정이 우연히 맞아떨어져 일본의 경제기적을 낳았다. 장인정신, 모노즈쿠리(もの造り)다. 일본이 이것 때문에 고생을 하기는 했다. 정보화 시대에 빠른 변신을 막았다. 모노즈쿠리 과잉은 적응력을 떨어뜨리고, 결핍은 인간의 자존감을 짓밟는다.
한국은 결핍증을 극심하게 앓는 세계적인 산업국가다. 빠른 추격(catch-up) 전략에 의해 대자본과 대공장이 공격수로 내세워졌다. 그 수많은 쟁이가 공장으로 빨려들어가 평범한 기능공이 됐다. 정보화 물결에 올라타면서 한국은 ICT 선도국가로 변신했지만 장기를 빼앗긴 더 많은 사람이 생업 현장에서 쫓겨났다. 장인의 터전은 파괴됐다.
작년 봄, 광양제철소에 명장(名匠)이 탄생했다. 놀랍게도 인문계 고등학교 출신이었다. 공고 출신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30년간 투혼을 발휘했다. 세계적인 기술 소유자다. 그게 뭔지 물어봤다. 끓는 쇳물을 철강판(후판)으로 만들 때 1000t 무게의 롤러가 눌러 준다(압연). 바로 그때 철강 표면의 흠을 줄이려고 기름을 살포하는데, 약 1초간 롤러 작동에 공백이 생긴다. 10m 정도 불량품이 나오는 것이다. 10년 연구 끝에 이걸 해결했다. 현장의 장인정신, 그걸 쳐주는 기업 없이는 불가능한 혁신이었다.
이에 비해 자동차산업에 취업한 공고 출신은 범인(凡人)이 됐다. 기술 자존감을 상실한 지 오래다. 조선업도 거의 마찬가지다. 용접 장인도 곧 사라질 것이다. 일본 도요타와 미쓰비시에선 장인이 여전히 우대를 받는다. 작업장에서 인사고과, 일감 분배도 이들 몫이다. 전공을 잃었을 때 자신을 보호하는 장치는 노동조합뿐, 기술권력을 잃은 노동자들은 저절로 전투적 노동운동에 은신한다.
58년 개띠는 할 말이 많다. 올해 퇴직하는 이들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다. 58년 개띠는 취업전선에서 오일쇼크를, 대리급에서 외환위기, 부장급에서 금융위기를 만났다. 구조조정이라면 이골이 난 세대다. 그래서 개척의 전사가 되기도 했다. 1998년 대리급 실직자는 치맥집을, 2008년 부장급 실직자들은 중국 시장을 개척했다. 생산직은 기술변동에 떠밀려 하도급업체와 비정규직을 전전했는데, 아무튼 허술했던 공장을 세계적 공장으로 만든 일등공신이다. 그러나 자존감을 발휘할 전공의 달인(達人)은 되지 못했다. 한국적 제도와 습성이 야속할 것이다.
전공에 통달한 명견(名犬)은 나름 견격(犬格)을 갖는다. 개가 이럴진대, 무술년은 인격(人格)의 창고인 전공을 우리가 어떻게 버렸는지를 반성하라고 이른다. 새해 벽두에 떠올린 장인(匠人)에의 꿈이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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