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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고엽(Autumn Leaves)' 原曲이 주는 감회

바람아님 2018. 1. 20. 06:25
문화일보 2018.01.19. 14:10



많은 가수가 제각각 부르던 ‘고엽’ 76세 밥 딜런 목소리로 듣는 행운

아무런 꾸밈 없는 원곡 멜로디 듣고 그동안 잊었던 모든 기억 되살아나

쇠락해가는 인생을 관조하는 회환 같은 노래도 나이 따라 다르게 울려


벌써 몇 년 전부터 스마트폰으로도 작곡이 가능해졌다. 이제는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나 노래를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되어 전 세계에서 새로 만들어지는 노래들이 실시간으로 인터넷을 통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가히 ‘노래 공해’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지경이다.


그런데 요즘 노래에서는 내가 젊었을 때 느꼈던 감동을 찾을 수가 없다. 혹시 귀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가 하고 몇 노래를 열심히 듣고 또 들어서 외워 봐도 역시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그 많은 노래와 차별화해서 만들려고 덧칠을 하다가 원래의 모습이 무언지 모르게 복잡해져 버린 요즘 노래들이 현대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젊은 세대에게는 당연한 음악일 것이다. 하지만 차분하던 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는 우리 또래의 사람들 감성과는 너무 멀어져서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것일 거라고 생각한다.


가을은 벌써 지난 지 오래고 지금은 한창 겨울이지만,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노래가 한 곡 있다. 우리에게 ‘고엽(枯葉)’으로 알려진 ‘오텀 리브스(Autumn Leaves)’이다. 너무 많은 가수가 이 노래를 부르면서 이렇게 저렇게 바꿔 부르는 바람에 원곡(原曲)의 멜로디로 노래하는 가수를 오랫동안 보지 못해서 익숙한 멜로디를 잊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기억 속에서 이 노래가 되살아났다.


몇 달 전, 여행지의 한 공연장에서 밥 딜런의 공연을 볼 기회가 있었다.

흑백영화 시대를 연상시키는 가스등으로 장식한 무대에서부터 백밴드의 사운드까지, 나이가 들면 느낌도 취향도 인생도, 아름다웠던 과거 시절로 돌아가는구나 하고 공감한 76세 싱어송라이터의 공연이었다.

부부가 사이좋게 손잡고 들어오는 어르신부터, 손자 손녀와 함께 온 어르신, 오토바이의 부르릉 소리가 묻어 있는 가죽옷의 어르신, 60년대의 히피 스타일로 청바지를 입고 긴 머리를 질끈 묶고 나타난 어르신, 그리고 보기 좋게 여유가 느껴지는 어르신까지…. 객석은 온통 어르신들로 채워져서 마치 몇십 년 뒤에 다시 모인 고교 동문 모임 같았다.


아, 나도 이 세대가 됐구나 하는 감회 속에 조용히 앉아서 팝콘을 먹으며 공연의 시작을 기다렸다. 맥주를 팔고 다니는 덩치 큰 친구의 커다란 목소리가 홀 안을 울리고 있는 가운데. 모두들 옛 친구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음악이 시작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한 시절에 젊음을 같이 보낸 동질성으로, 서로의 눈빛이 끈끈하게 극장 안에 있는 모두를 이어주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래, 누구의 콘서트를 보러 왔다기보다는, 우리가 함께 살아온 시절의 친구, 그 친구는 나를 잘 몰라도 나는 그 친구를 너무나 잘 알아서 가깝게 느껴지는, 그런 동창을 오랜만에 만나보는 설렘 같은 거였다.


기다리던 밥 딜런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인사도 없고 곡목 소개도 없이 20여 곡을 내리 노래하다가 공연 마지막 무렵에 이 노래 ‘오텀 리브스’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온갖 상념이 밀려왔다. 탁한 목소리로 아무 감정 없이 얘기하듯 툭툭 던지는 가사를 들으며 손바닥 같은 떡갈나무 잎사귀, 단풍, 가을 햇살, 색 바랜 입술, 입맞춤…이 떠올랐다.


요즈음은 노래하는 테크닉이 너무 다양해져서 가끔은 전혀 다른 노래처럼 들릴 정도로 원래의 멜로디를 뒤틀어서 노래하고 연주하는 게 멋으로 느껴지는 시대가 되었는데, 갑자기 아무 꾸밈없이 원곡의 멜로디로 부르는 이 노래를 듣고는 잊었던 모든 기억이 되살아났다.

2010년에 발표한 에릭 클랩턴의 앨범을 듣다가, 원곡에서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인생을 관조하듯 담담하게 부른 이 노래를 발견하곤 ‘어렸을 때부터 들은 멜로디와 느낌은 바로 이런 거였는데, 왜들 이상하게 불러서 내 기억을 뒤흔들어 놓나…, 내가 알고 있던 이 노래 ‘고엽’을 들려줄게’ 하는 속마음이 읽혀 깊이 공감하던 느낌까지도 되살아났다.


‘창문에 흩날리며 떨어지는 잎들

빨갛고 금빛 물든 그 가을 잎들

당신 입술을 본다. 여름날의 입맞춤들


햇볕에 그을린 손을 내가 잡곤 했지

당신이 떠나간 후로 시간은 길어지고

곧 난 오래된 겨울 노래를 듣겠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당신이 그리워, 내 사랑

가을 잎이 떨어지기 시작할 때…’


사실, 가사의 내용은 가을날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느끼는 회한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노래를 들으면 괜스레 오 헨리의 단편 ‘마지막 잎새’도 생각이 난다.


‘오텀 리브스’라는 노래가 참 묘한 것이, 젊은 가수가 이 노래를 부를 때면 가을에 낙엽이 지고 겨울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시작되고 연인이 떠나도 다른 연인이 생길 것 같은, 계절이 바뀌면서 새롭게 솟아나는 희망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이날 밥 딜런의 노래를 들으며 느낀 상념은, 낙엽이 떨어지고 겨울이 오고…, 다시는 봄이 오지 않을 것 같은…, 쇠락해 가는 인생을 관조하는 가수의 회한이었다.


같은 노래의 느낌이 나이에 따라 다르게 울리는구나, 나이를 먹어도 노래가 아름답게 들리는구나… 하고 부러웠다. 그리고 모두 같은 마음인지 노래가 끝나도 오랫동안 박수 소리 없이 노래가 주는 여운을 음미하고 있었다.

공연의 타이틀인 ‘네버 엔딩 투어(Never Ending Tour)’의 의미를 곱씹으며 밖으로 나오는데…, 입안이 깔깔해서 돌이켜보니 그 큰 팝콘 한 통을 다 먹어버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