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09.05.16 이한수 기자)
열녀의 탄생 | 강명관 지음
돌베개|856쪽|3만8000원
기산 김준근의 풍속도첩 중 하나.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 '열녀(烈女)'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고려사〉에는 '열녀' 혹은 '열부(烈婦)'라는 말 대신 '절부(節婦)'라는 말이 등장한다. '열부'가 '남편을 위해 죽거나 혹은 폭력을 당하여도 굴하지 않고 죽은 사람'인 반면 '절부'는 '남편의 사망 이후 개가(改嫁)하지 않은 여성'이다. 그런데 고려시대의 '절부'는 "아내가 죽은 뒤 다시 아내를 얻지 않은 남자"를 뜻하는 '의부(義夫)'에 상대되는 개념이었다. 아내만 남편에 대한 수절(守節) 의무가 있는 게 아니라 남편도 아내에 대해 수절의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세조 12년(1466) 편찬된 《경국대전》에서 '의부'가 사라진다. 〈고려사〉에는 "효자(孝子)·순손(順孫·조부모를 잘 모시는 손자)·의부·절부"라는 표현이 늘 함께 등장하지만, 《경국대전》〈예전(禮典)〉에는 효자·순손·절부만 남고 '의부'가 빠진 것이다.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인 저자는 "이로 인해 배우자가 사망하거나 부재할 경우 다시 배우자를 구하지 않는 것은 여성만의 의무가 되었다"면서 "그것은 곧 남성의 성욕만이 관철되는 사회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열녀'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세종 14년(1432) 편찬된 〈삼강행실도〉 열녀편이 보급되면서부터다. 국가가 만든 텍스트를 통해 '열녀'라는 관념이 전파된 것이다. '열부'가 '열녀'로 바뀐 것은 결혼하지 않은 여성까지 포괄하기 위해서였다. 수절한 여성에게 정문(旌門)을 세워주는 '당근'과 개가(改嫁)한 여성의 자식을 관리로 임명하지 않는 '채찍'을 통해 여성의 대뇌에 가부장적 담론을 설치하는 작업은 계속 진행됐다. 저자는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거치며 죽음으로 절개를 지키는 '열녀'라는 관념이 더욱 강화되고 17세기 중반 혼인제도가 부처제(婦處制·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장가가는 제도)에서 부처제(夫處制·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시집가는 제도)로 바뀌면서 '국가·남성의 여성에 대한 통제는 완벽하게 작동하게 됐다'고 말한다.
신윤복의 풍속화〈월하정인(月下情人)〉.
강명관 교수는‘열녀’라는 관념은 고려 말·8조선 초
등장하여 17세기 이후 정착된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결론은 단순하다.
'모든 것은 조선을 지배했던 남성·양반의 의도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여성의 머릿속에 주입할 텍스트를
편집과 조작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내고 국가 기구를
통해 인쇄하여 의도적으로 또 강제적으로 500년에 걸쳐
유포했다. 그 결과 그 텍스트들은 여성의 대뇌를
차지하고, 여성의 행동과 의식을 통제하게 되었던
것이다.'(553쪽)
그러나 몇 가지 의문이 남는다.
저자의 결론은 인륜[강상·綱常]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를
꿈꾼 당대 지식인들의 고민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현재의 관점을 과거에 투영하여 역사를 재단하는
것일 수 있다. 조선 500년간 여성은 수동적으로 종속성을
내면화하게 됐다는 설명은 당대 여성의 주체성을
오히려 폄하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성적 종속성을 강요한 최초의 공작"(49쪽)이라든지,
"성적 종속성은 국가·남성의 이익을 위해 고안되고,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주입된 것'(550쪽)이란 표현처럼
책 곳곳에서 토로하는 저자의 '분노'와 '확신'은
미리 결론을 가지고 사료에 접근한 듯한 느낌을 준다.
'열녀'라는 관념이 만들어진 것이며, 17세기 이후 성리학적 가부장제가 정착되었다는 설명이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열녀'라는 의식이 만들어지고 강화되는 과정을 중국과 한국의 사서(史書), 실록과 문집 등 관련 문적(文籍)을
샅샅이 뒤져 실증적으로 제시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열녀의 탄생 : 가부장제와 조선 여성의 잔혹한 역사 조선이 건국하는 1392년부터 조선조가 종언을 고하는 시기까지 5백 년 동안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진행되었던 남성-양반에 의한 여성 의식화 작업을 추적한 책이다. 조선 시대의 남성-양반은 국가권력이 장악한 인쇄·출판 기구를 동원해서 일방적으로 강제적으로 심고자 했다. |
열녀는 성적 종속화의 도구였다 (부산일보 2009-05-23 임광명 기자) | |
열녀의 탄생/강명관
"왜 배운 적도 없는 가부장적 차별 의식을 갖게 됐는가? 유교 때문? 그렇다는 말은 들었지만 유교의 어떤 부분이, 또 어떤 과정을 거쳐 그렇게 됐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열녀의 탄생-가부장제와 조선 여성의 잔혹한 역사'(돌베개/3만8천원)를 쓰게 된 이유를 "그런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책은 지루할 정도로 길지만 결론은 단순하다"고 했다. 모든 것은 "조선의 남성-양반의 의도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여성을 종속시키기 위한 국가의 지원도 대단 소위 열녀(烈女)가 남성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라는 주장은 흔한 것이다. 강 교수의 초점은 그 주장의 근거를 자료를 통해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데 있었다. '고열녀전', '고금열녀전', '이십오사', '삼강행실도',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조선왕조실록' 등 사료로 남아 있는 열녀 관련 자료를 거의 망라했다. 분명히, 고려시대에는 열녀의 개념이 없었다. 있었다면 의부(義夫)와 짝이 되는 절부(節婦)만이 있었다. 배우자에 대한 절개는 여성만큼 남성에게도 강요됐다는 말이다. 그런데 조선조에 와서 달라졌다. 남성의 의무는 사라지고 여성의 성적 종속성은 강화됐다. 강 교수는 "국가 이데올로기로서의 유교적 가부장제 확립"을 이유로 들었다. 유가(儒家)는 국가를 가족의 확장으로 봤고, 국가의 안정을 위해서는 가정의 안정이 우선돼야 했으며, 가정의 안정에는 남성이 권력 독점이 필요했다. 열녀는 그를 위한 도구였던 것이다. 여성을 종속시키기 위한 국가(권력)의 지원은 대단했다. 부녀자가 재가할 경우 자녀의 관직 진출을 제한하고, 수절할 경우 논과 밭을 지급하며 사회적 명예를 법으로 보장했다. 국가가 거의 독점하고 있던 인쇄·출판 시스템을 동원해 열녀를 찬양하고 그 이데올로기를 확산시켰다. 소학이나 삼강행실도, 내훈 등은 좋은 예다. 소학이나 내훈은 일부종사(一夫從事)의 삶을 가르쳤다. 삼강행실도는 절개의 위기가 닥쳤을 때 신체의 일부를 훼손하거나 자결하라는 등 여성이 어떤 방법으로 열녀를 실 천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줬다. 실 사례는 찬양고무됐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게 저항하다 난도질 당해 죽은 '이씨단지(李氏斷肢)' 따위 고사가 무려 441건이나 똑같은 서사로 반복되고 있다. 그 외에도 '계녀가(誡女歌)' 등 규방가사로 불리는 문학작품들도 여성을 종속시키는 텍스트로 기능했다. 강 교수는 "이 문제는 오늘날의 문제와 통한다"며 "내가 하는 말, 내가 갖는 가치관은 정말로 나의 것인가? 국가와 자본은 교육과 미디어라는 권력기구를 통해 개인을 끊임 없이 제작하고 간섭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지금 사고하는 '나'는 참된 주체인가? 다소 철학적인 문제지만, 참으로 궁금해서 한 번쯤은 고민해 볼 일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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