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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민의 뉴스 저격] "남로당 반란 가담자와 무고한 희생자 구별이 4·3 진실 규명의 본질"

바람아님 2018. 4. 20. 17:39

(조선일보 2018.04.20 이선민 선임기자)


[오늘의 주제:

'제주 4·3 진실규명도민연대' 상임대표

신구범 前 제주도지사는 왜 나섰나]


- 나도 어릴때 4·3 겪어
자라면서 연좌제 묶여 고생도 했고 고심도 했다


- 4·3 특별법 개정안은 '改惡'

기존 특별법엔 '소요사태'… 이를 아예 '민중항쟁'으로 바꾸려는 건 진실의 왜곡


- 편향성 바로잡을 것
4·3 보고서의 허위 부분 분명히 밝혀내겠다… 대한민국을 부정한 폭도 마을 단위 개별조사해야


제주 4·3사건 70주년을 맞아 관련 단체들로 구성된 '제주4·3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는 지난달 말부터 추념 행사를 가졌다. 4·3을 '국가 폭력' '학살'로 규탄하는 함성이 전국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가운데,

제주에서 "4·3은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하여 일으킨 남로당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라는 목소리가

외롭게 들려왔다.

올 2월 활동을 시작한 '제주4·3진실규명을위한도민연대'의 신구범(76) 상임대표를 만났다. 그는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 오현고 졸업 후 육군사관학교를 4학년 때 중퇴한 뒤 행정고시에 합격해 제주도와 농림수산부에서 근무했다.

1993년 말 제주도지사로 임명됐고 1995년 초대 민선 제주도지사(무소속)에 당선돼 1998년까지 재임했었다.


'제주 4·3 70주년 특별전(展)'이 열리고 있는 서울 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앞에 선 제주4·3진실규명도민연대 신구범 상임대표.
'제주 4·3 70주년 특별전(展)'이 열리고 있는 서울 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앞에 선

제주4·3진실규명도민연대 신구범 상임대표. 그는“역사를 왜곡한 4·3 보고서에 토대를 둔

전시회는 결코 4·3의 진실을 보여줄 수 없다”고 말했다. /김지호 기자


―'4·3진실규명도민연대'는 왜 만들어졌고, 어떤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나.

"2000년 제정된 4·3특별법에 따라 2003년 발간된 4·3 보고서의 편향성과 역사 왜곡에 분개한 김태혁 전 제주도 교육감,

김영중 전 제주경찰서장, 이동해 장로, 문대탄 전 제주일보 논설위원, 장승홍 전 조선일보 기자 등이 2009년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를 만들어 4·3 보고서의 허위를 밝히고 4·3의 역사를 바로잡는 활동을 벌여왔다.

작년 말 4·3특별법을 더욱 개악하는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된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나와 박찬식 전 제주도 행정부지사,

현태식 전 제주시의회 의장 등이 이에 가세해서 4·3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도민연대가 출범했다."


―도민연대는 어떤 활동을 벌이고 있는가.

"첫째는 앞서 언급한 4·3특별법 개정안의 문제점을 부각해서 저지하는 것이다.

이 개정안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를 여러 가지 안고 있다.

둘째는 4·3 보고서의 허위성을 밝히고 우리가 그동안 자체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제주4·3도민진실보고서'를 발간하는 것이다. 도민진실보고서는 오는 6월 25일 이전에 발간하려고 한다.

셋째는 제주4·3평화재단이 2004년부터 진행해온 진상 추가 보고서를 공개하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4·3재단은 4·3특별법에 따라 후속 조사 작업을 마치고도 무슨 이유에선지 공개하지 않고 있다."


―4·3특별법 개정안이 어떤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보는가.

"기존 4·3특별법은 4·3을 '소요 사태'로 규정했다. '소요 사태'만 해도 남로당의 무장 반란이라는 사건의 본질이 은폐되는데

개정안은 더 나아가 4·3의 성격을 아예 '민중 항쟁'으로 바꾸려 한다.

그리고 4·3위원회가 결정한 4·3의 '진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해서

4·3위원회의 주장에 대한 비판을 원천 봉쇄하고 있다. 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열렸던 4·3 사건에 대한 군사재판을

소급해서 무효화하고 있다. 이는 사법적 결정 위에 군림하려는 발상이다."


제주 4·3 연표


―4·3 보고서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다.

"남로당 무장대는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한 것인데 이런 사실을 외면했다.

또 남로당의 반란에 가담한 폭도와 무고한 희생자를 분명히 구별해서 추념해야 하는데 이를 뭉뚱그렸다.

양자를 구별하려면 개별 조사가 불가피하다. 70년 전에 일어난 4·3 사건은 마을 단위로 들어가면 다 진실을 밝힐 수 있다."


―4·3의 해법으로 '선(先) 성격 규명'을 주장하고 이를 위한 '범(汎)도민 토론회'를 제안했는데.

"4·3 보고서는 '4·3의 성격 규명은 후대 사가(史家)들의 몫'이라고 했다.

그러나 성격 규명이 선행되지 않고 진행되는 모든 사업은 헛일이다.

4·3의 발발 과정은 덮어버리고 인권탄압이 본질이라고 하면 국가 폭력으로 결론 날 수밖에 없다.

그동안 4·3정립연구유족회가 여러 차례 토론을 제의하고 도지사 면담도 요청했지만 거부됐다.

이제라도 제주도지사가 중재해서 '4·3'에 관한 범도민 토론회를 개최할 것을 제의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4·3 추념사에서 "국가 폭력의 진상을 밝히겠다"

"이념은 단지 학살을 정당화하는 명분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그런 언급은 4·3이 남로당의 무장봉기였다는 4·3 보고서 내용과도 어긋난다.

또 "희생자가 3만명으로 추정된다"고 했는데 정부 공식 조사에 따르면 1만4000명이다.

대통령이 이렇게 민감한 문제에 대해 일부의 주장을 근거로 추정치를 말해서야 되겠는가.

그리고 "(이런 주장이) 역사적 사실임을 선언한다"고 했는데 역사학자도 아닌 대통령이 그렇게 말할 권한이 있나."


―그동안 4·3을 둘러싼 제주도 내 갈등에 적극 나서지 않다가 이번에는 앞장서서 활동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도 제주 출신으로 어려서 4·3을 겪었고 자라면서 연좌제에 묶여 고생도 했다.

그래서 1993년 말 고향에 도지사로 부임한 뒤 무엇보다 이 문제를 고심한 끝에 1994년 4월 3일 좌우를 아우르는

합동 위령제를 처음 개최했고, 정부가 책임지고 진상을 규명하고 사과한다는 의미에서 기념비적 사업을 해 줄 것을 건의했다.

이렇게 4·3 문제 해결을 위해 내 나름대로 노력한 사람으로서 이번 4·3특별법 개정안은 그대로 방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제주도 일부에서는 도민연대의 활동을 역사의 흐름을 4·3 문제가 간신히 터져 나오기 시작한

30년 전으로 돌리려는 시도라고 비판한다.

"제주도 사람들은 4·3 때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때 적대적이었던 집안끼리 사돈을 맺을 정도가 됐다.

내가 4·3 문제 해결을 고민하면서 찾아뵀던 당시 천주교 제주교구장 김창렬 주교님은

'상처가 아물 때는 헤집는 게 아니다' 하셨다. 40년이 지나 겨우 아물어가던 4·3의 상처를 마구 헤집어 악화시킨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역대 정부가 정치적 목적에서 그들을 부추겼다. 우리는 지난 30년 동안 잘못 진행된 걸 바로잡고 싶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국민과 제주도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10년 전 온 나라를 뒤흔들었던 광우병 파동은 결국 진실이 아니란 것이 밝혀졌다.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정의'는 무너지는 법이다. 당장 어느 쪽 세(勢)가 강하냐가 아니라 역사적 진실에 따라 결판이 난다.

먼저 4·3의 진실을 밝혀서 성격을 규명해야 한다.

그리고 그 바탕에서 책임을 물을 대상은 묻고 무고한 희생자는 위로하면 된다."


4·3특별법 개정안 3개 계류… 좌파의 요구 대거 담긴 것도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4·3 추념사에서 '4·3의 완전한 해결'을 약속하며 "입법이 필요한 사항은 국회와 적극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사태' '항쟁' '폭동' 등 제각각 부르고 있는 4·3의 명칭과 관련해 청와대 관계자는

"사회적 합의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라고 했다.


현재 국회에는 2016년 8월과 작년 12월 더불어민주당 강창일(제주갑) 의원과 오영훈(제주을) 의원,

올 3월 바른미래당 권은희 의원이 각기 대표 발의한 3개의 '4·3특별법 개정안'이 제출돼 있다.


이 가운데 오영훈 안(案)은 좌파가 요구해온 내용을 대거 담고 있다.

4·3사건의 정의(定義)를 '미 군정기인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발생한 경찰의 발포 사건을 기점으로

경찰과 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제주도민의 저항과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한 무장대가 봉기한 이래…'로 바꾸어 '항쟁'의 성격을 뚜렷하게 했다.


또 '위원회 결정으로 인정된 제주4·3사건의 진실을 부정·왜곡하여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훼손해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이를 위반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해

위헌(違憲) 요소가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