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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손때 묻은 둥지를 떠나는 이들.. 뒷마당 진달래는 여전히 화사한데

바람아님 2018. 4. 21. 07:57

조선일보 2018.04.20. 04:01


[박상현의 안단테로 살아보니]

노인용 보행기에 의지해 걸음을 옮기는 말리(Marli) 할머니의 구부정한 등을 바라보다 문득 떠오른 말이다. 가끔씩 정원을 돌봐주기 위해 찾는 널따란 단층집. 앞마당엔 다복다복 피어난 헤더(heather) 꽃이 화사하고 뒷마당은 고운 자갈로 산책로를 만들어 더없이 깔끔하다. 그 예쁜 집에서, 그녀는 항상 혼자서 나를 맞았다. 남편은 세상과 이별한 지 오래고, 하나뿐인 아들은 멀리 토론토에 새로운 둥지를 틀고 자신만의 세상을 살아가는 탓이었다.


가족이 함께 지낼 때에는 이렇게 썰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침마다 출근을 서두르는 남편과 학교에 가야 하는 아이 덕분에 꽤나 분주했을 터이다. 봄볕이 따사로운 주말 아침엔 남편과 정원 한쪽에 놓인 자그마한 테이블에 마주 앉아 향긋한 커피를 마셨을 것이다. 지금도 그 테이블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젠 모두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찾아갈 때마다 할머니 집은 왠지 모르게 허전했다. 무표정한 하얀 집은 쇠약해진 할머니를 포근하게 감싸주질 못하는 것만 같았고, 병약한 할머니 혼자서 온기 있는 집을 만들 여력이 없어 보였다. 할머니와 집은 서로에게 의지가 되었던 시절을 까맣게 잊은 채 불편하고 버거운 동거를 겨우겨우 이어가는 중이었다. "집을 내놔야겠어. 몸이 영 말을 듣질 않아."

혼자 정원을 가꾸며 말년을 보낸 집을 떠나기로 결심한 말리 할머니의 뒷모습. 어디로 가실 것인지 차마 묻질 못했다.
/ 박상현씨 제공


정원 일을 해 달라고 전화한 할머니가 불쑥 던진 얘기였다. 집을 팔고 나면 어디로 가실 건지는 묻질 않았다. 그동안 만났던 노인 고객들을 통해 미뤄 짐작할 뿐이다.


한국을 떠나 이민 온 지 45년이나 되었다는 마리아 할머니는 혼자 사시던 집을 처분하고 딸이 사는 큰 도시에 자그마한 아파트를 사서 이사하셨다. 멀리서 혼자 사는 게 속 편하다 하셨지만, "성공한 자식들 면(面)이 안 서는 일"이라시며 결국 자식 곁으로 가셨다. 아흔 살이 다 되도록 집을 지키시던 아이다혼 할머니는 요양 시설이 갖춰진 시니어 홈(senior home)으로 들어가셨다. 당신 손때가 묻은 빨간 금낭화 꽃이 예쁘게 피어난 즈음이었다.


아직도 내 휴대폰엔 그렇게 떠나가신 내 어머니 같은 분들의 전화번호가 저장돼 있다. 더는 전화가 걸려올 리 없겠지만, 선뜻 지울 수가 없다.

보름 전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말리 할머니의 정원을 찾았다. 진달래는 올봄에도 여전히 화사한 분홍 꽃을 피웠고 그녀가 떠날 것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때 이른 장미꽃 한 송이가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나를 반갑게 맞이한 말리 할머니.


"아직 부동산에 얘기도 안 했는데, 집을 사겠다는 사람이 있네."

할머니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수월하게 새 주인이 나타나 다행스러워하시는 듯했지만, 현실로 닥친 이별에 대한 아쉬움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진달래가 곱게 핀 봄에 떠나시는 게 차라리 잘된 일 같다. 그 화사한 뒷마당이 당신이 떠나는 둥지의 마지막 기억으로 오래오래 남을 거라 믿기 때문에.

  

박상현 캐나다 부처트 가든 정원사·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