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18-02-21 03:00
이러한 상황에서 레비나스가 질문을 받은 것이다. 이스라엘의 건국과 더불어 고향에서 내쫓겨 난민촌을 전전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이 그가 말하는 타자, 즉 섬김의 대상이 아니겠느냐, ‘타자의 철학자’라 불리는 당신의 생각은 어떠냐. 이것이 질문의 요지였다.
실망스럽게도, 레비나스는 질문자와 생각이 다르다며 유대인의 편을 들었다. 그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이웃을 공격하고 부당한 취급을 하는” “잘못된 사람들”이라고 했다. 세상의 타자들을 위로하는 ‘타자의 철학’을 설파한 철학자라면, 자신이 아무리 유대인이라고 해도 자민족 중심주의에 빠져 타자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너무 큰 모순이었다. 그의 철학이 주는 위로의 몸짓마저 잠시나마 허위로 느껴지게 만드는 모순이었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말과 행동이 어긋나는 모순, 이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타자의 철학자’라 불리는 에마뉘엘 레비나스조차도 예외가 아니니까.
그가 누구인가.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존재한다”라는 철학자 데카르트의 말을 공박하며 그 말 속에 들어 있는 자기중심적인 속성이 결국에는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진다고 설파한 철학자다. ‘생각하는 나’의 자리에 타자를 먼저 생각하는 ‘윤리적인 나’를 놓아야 한다고 부르짖은 철학자다. 나보다 타자가 먼저라니. 가난하고 아프고 소외받은 약자들이 먼저라니. 그들에 대한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생각인가. 많은 사람들이 그의 철학에 환호하는 것은 그가 제시한 윤리가 인간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성향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비나스가 질문을 받은 것이다. 이스라엘의 건국과 더불어 고향에서 내쫓겨 난민촌을 전전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이 그가 말하는 타자, 즉 섬김의 대상이 아니겠느냐, ‘타자의 철학자’라 불리는 당신의 생각은 어떠냐. 이것이 질문의 요지였다.
실망스럽게도, 레비나스는 질문자와 생각이 다르다며 유대인의 편을 들었다. 그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이웃을 공격하고 부당한 취급을 하는” “잘못된 사람들”이라고 했다. 세상의 타자들을 위로하는 ‘타자의 철학’을 설파한 철학자라면, 자신이 아무리 유대인이라고 해도 자민족 중심주의에 빠져 타자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너무 큰 모순이었다. 그의 철학이 주는 위로의 몸짓마저 잠시나마 허위로 느껴지게 만드는 모순이었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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