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18-02-28 03:00
그는 자식을 잃은 아버지로서 별별 생각을 다 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꿈이 암시하듯 자기 때문에 아들이 죽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만큼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이었다.
그러나 장수 체면에 드러내놓고 울 수가 없어 염간(鹽干), 즉 소금 굽는 사람인 강막지의 집으로 가 숨어서 통곡했다. 아들이 전사했다는 편지를 받고서는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했고 며칠 후에는 “코피가 한 되 남짓” 났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면이 죽는 꿈을 꾸고는 목 놓아 울었다”라고 쓰인 11월 7일자 일기가 말해주듯, 꿈을 꾸는 것이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전부였는지 모른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이때의 꿈은 아들을 살아있게 하고 싶은 무의식의 발로였다. 현실에서는 아들을 살려내는 게 불가능하니까 그것이 가능해지는 꿈을 꾼 것이다. 다시 죽더라도, 죽기 전에는 다시 살아있는 거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우리의 영웅도 그런 꿈에 의존했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꿈은 과거와 현재, 미래와 관련하여 우리의 무의식이 그려내는 일종의 은밀한 그림이다. 이순신 장군은 그것에 민감하게 반응한 사람이었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곳저곳에 꿈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는 꿈을 꿀 때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보려고 했다. 1597년 10월 14일자 일기에도 꿈에 관한 언급이 있다.
“꿈을 꿨다.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속으로 떨어졌지만 거꾸러지지는 않았다. 막내아들 면(])이 나를 안고 부축했다. 그 장면에서 나는 잠이 깨었는데, 무슨 징조인지 알지 못했다.” 말에서 떨어지고 막내아들의 부축을 받다니, 상서롭지 않은 꿈인 건 분명했다. 그날 저녁이었다. 천안에서 보낸 편지가 도착했다. 그는 겉봉에 쓰인 통곡(慟哭)이라는 글씨만 보고도 막내아들이 죽었음을 직감했다.
그는 자식을 잃은 아버지로서 별별 생각을 다 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꿈이 암시하듯 자기 때문에 아들이 죽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만큼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이었다.
그러나 장수 체면에 드러내놓고 울 수가 없어 염간(鹽干), 즉 소금 굽는 사람인 강막지의 집으로 가 숨어서 통곡했다. 아들이 전사했다는 편지를 받고서는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했고 며칠 후에는 “코피가 한 되 남짓” 났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면이 죽는 꿈을 꾸고는 목 놓아 울었다”라고 쓰인 11월 7일자 일기가 말해주듯, 꿈을 꾸는 것이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전부였는지 모른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이때의 꿈은 아들을 살아있게 하고 싶은 무의식의 발로였다. 현실에서는 아들을 살려내는 게 불가능하니까 그것이 가능해지는 꿈을 꾼 것이다. 다시 죽더라도, 죽기 전에는 다시 살아있는 거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우리의 영웅도 그런 꿈에 의존했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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