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우리의 붉은 깃발법
고정애 중앙일보 2018.08.09. 00:07카이사르의 말을 1500년 만에 재발굴한 건 마키아벨리였다. 시오노 나나미는 “어떤 정치시스템도 당초의 동기는 선(善)이었을 것이고 그 시스템으로 잘돼 가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선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악으로 바뀌어 간다”(『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고 해석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은산분리 규제를 영국의 ‘붉은깃발법’에 비유한 것을 들으며 떠올린 경구다. 문 대통령은 “자동차 속도를 마차 속도에 맞추려고 자동차 앞에서 사람이 붉은 깃발을 흔들게 했다. 결국 영국의 자동차 산업은 독일과 미국에 뒤처지고 말았다. 규제 때문이었다”고 했다. 동의한다. 다만 문 대통령이 프랑스가 아닌 미국을 언급했는지는 의아하다. 그 무렵 미국은 영국처럼 승합마차의 나라여서다.
사실 붉은깃발법이 만들어진 1865년의 자동차는 증기기관을 단 차였다. 1863년 증기기관차가 달리는 일종의 지하철을 개통한 영국이었지만 증기차엔 소극적이었다. 불똥만 잘못 튀어도 화재를 일으킬 수 있었고 매캐한 검은 연기와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소음, 포장도로를 망가뜨리는 육중한 무게도 문제였다. 한마디로 말(馬)보다 못했다는 얘기다.
그러다 경구대로 규제가 ‘악’으로 바뀌는 순간이 왔다. 에드워드 버틀러란 발명가가 가솔린 내연기관을 단 운송수단(Petro-cycle)을 선보인 1885년 무렵부터다. 카를 벤츠(motorwagen)와 같은 시기였다. 버틀러는 그러나 5년 뒤 “붉은깃발법 때문에 당국이 도로 주행을 허용하지 않는다”며 기술 개발을 포기했다.
영국은 결국 1896년 붉은깃발법을 폐지했다. 독일 차가 영국 내 공공도로를 달리기 시작한 지 1년 만이다. 한 자동차박물관은 “1895년 말 영국 내 자동차 수는 14~15대”라고 했다. 그러므로 문 대통령의 인용으로 ‘우스꽝스러운 규제가 영국 자동차 산업을 망가뜨릴 정도로 지속했다’는 인상을 받았을 순 있겠으나, 실상은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불과’ 수년이다. 그런데도 붉은깃발법은 시대착오적 규제를 상징하게 됐다.
은산 분리는 더 심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경쟁국과 달리 10년 넘게 제자리다. 문 대통령의 당부대로 풀 때가 됐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은산분리만이랴. 곳곳에 그런 규제들이 있다. 문제는 규제로 인한 폐해만이 아니다. 철 지난 규제를 유지하느라 그 사이 더 고민해야 할 새로운 시대의 문제를 놓치고 있다는 점이다. 풀 건 풀자.
고정애 중앙SUNDAY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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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송평인]붉은 깃발法
동아일보 2018.08.09. 03:00▷한국인은 페이스북의 성공을 보면서 묘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페이스북이 미국에서 선보인 소셜미디어 개념의 서비스를 한국인은 페이스북이 국내에 소개되기도 전에 이미 싸이월드를 통해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브스쿨 열풍이 불어 불륜을 조장한다는 비난까지 나왔을 정도다. 그럼에도 싸이월드가 페이스북 앞에서 맥을 못 춘 것은 인터넷실명제라는 규제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한국인의 근대 경험에서 공백 중 하나가 수표에 대한 경험이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자기 명의 수표를 써본 적이 없다. 고작 써본 것이라곤 은행의 자기앞수표다. 서구에서는 지금도 자기 명의로 사인한 수표를 많이 쓴다. 우리는 신용결제에서 수표를 건너뛰어 더 편리한 신용카드로 넘어왔다. 하지만 어느샌가 다시 기존 결제시스템 중심의 금융 규제가 질곡이 돼 핀테크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제 인터넷전문은행의 진입장벽 완화를 강조하며 ‘붉은 깃발 법’을 거론했다.
▷정부마다 규제개혁 정책의 상징이 하나씩 있다. 이명박 정부 때는 전봇대였고 박근혜 정부에서는 손톱 밑 가시였다. 그럼에도 전봇대도, 손톱 밑 가시도 제대로 뽑혔다고 할 수 없다. 이번에는 붉은 깃발을 뽑아낼 수 있을까. 어느 시대나 규제개혁은 쉽지 않은 듯하다. 이 주의 붉은 깃발, 혹은 이달의 붉은 깃발, 혹은 올해의 붉은 깃발을 선정해 퇴치하는 지속적인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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