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9.22 정상혁 기자)
산책주의자의 사생활
황주리 지음|파람북|280쪽|1만5500원
"일부러라도 기운을 내서 씩씩한 걸음으로 걸어본다. … 모두 사는 날까지 행복하라."
서양화가 황주리(61)가 10년 만에 펴내는 산문집. 벙어리라 놀림받던 과묵한 유년부터
다 커서는 한국말 어눌한 사기꾼에게 보이스피싱 당하는 들쑥날쑥한 보행 기록을
산책 속도로 풀어냈다. 세계 여행기 23편도 묶었다.
거짓말, 가난, 예술의 여러 길목마다 인생의 아이러니가 작동한다.
심지어 개한테도. "순이의 임신을 막기 위해 우리 가족은 순이를 철조망에 가두고, 웅이의 거세를 결정했다.
…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 웅이는 병원에 가서 거세를 당하고, 순이는 동네를 돌아다니는 낯선 수캐의 새끼를 뱄다.
… 어리석은 인간이 하는 짓이란 어쩌면 다 이런 식이 아닐까?"
그러나 그 모든 어리석음에 사랑이 잠복해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으로 꿈속에서나마 함께 추는 춤, 죽은 남동생의 휴대폰으로 본인에게
전화를 거는 슬픈 놀이의 기억….
"'연애하시나 봐요. 그림 속에서 연인들이 자전거를 타고 있네요. 입맞춤하고 포옹을 하고 행복해 보이네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생각한다.
내가 사랑 풍경을 자주 그리는 건 죽은 뒤에는 할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 사랑이기 때문이라고."
책 곳곳에 저자의 그림이 글과 포개지며 보온(保溫)한다.
10월 14일까지 가나아트 부산에서 저자의 개인전 '추억의 고고학'이 열리는데,
책 표지 그림 '식물학' 외에도 원고지, 의자, 망치 등 일상의 낡은 지층에 붓질한 작업을 다수 선보인다.
추억은 그런 곳에서 곧잘 발굴되곤 하므로.
출판사 서평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석남미술상과 선미술상을 수상하며 그 창의적이고 뛰어난 미술 세계를 인정받았던 화가 황주리에게는 또 하나의 특출난 소질이 있다. 감각을 한눈에 알아본 눈밝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내성적인 소녀는 일찍이 미술에 두각을 드러냈지만, 출판사를 운영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책에 둘러싸여 자라며 글을 가까이 접했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글에 대한 갈증을 느껴 일간지 등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며 책을 펴내고 소설도 쓰는 분주하고 열정적인 과정을 이어갔다. 그림의 소질을 어머니가 발견했다면, 글의 소질은 저자 스스로가 그리고 독자가 발견한 셈이다. 『산책주의자의 사생활』은 이런 열정의 산물이다. 작가 황주리가 오늘의 자신을 이룬 많은 것들 가운데, 가족과 사람 그리고 여행에 대해서 깊은 속내를 털어놓은 책이다. 사업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딸에게는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주었던 아버지, 아버지의 사업 뒷바라지를 하면서도 늘 중심을 잃지 않았던 어머니, 한창 일할 나이에 “내가 우려하던 모든 일이 일어났다”라는 글을 남기고 황망히 세상을 떠난 남동생, 사랑이란 느낌을 주었던 강아지 베티까지. 이 세상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이런 ‘가족사’라는 프리즘을 통해 저자를 바라보면 어디서나 당당한 화가라는 수식어를 벗어든 한 명의 사람이 그냥 서있다. 어느 골목길로 접어들든 만날 것 같은 사람, 마음의 깊은 곳까지 함께 걷고 싶은 그런 사람을 만난다. 여행할 때 항상 밝은 날만 있진 않다. 밝은 날은 밝아서, 흐린 날은 흐려서 추억이 된다. 인생의 길도 걱정이 쌓여 위로가 되고, 상처가 쌓여 용기가 된다는 것을 60의 고개에서 저자는 담담히 들려준다. 저자는 『산책주의자의 사생활』에서 높고 낮은 인생의 요철들마저 가벼운 산책과 같았다고 인생에 감사하는 마음을 전한다. “괜찮아, 괜찮아.” 『산책주의자의 사생활』은 저자가 사랑하는 네 가지 주제로 나뉘어 총 4장으로 되어있다. 1장은 사람과 세상 이야기다. 조금 멀찍이 거리를 두고 대상을 바라보면 예쁘지 않은 것이 없다. 심지어 저자는 “오랜만에 만나는 지인들과의 자리에서 평소에 좀 얄미운 존재를 만나도 반가울 때가 있다.”(96쪽)고 술회한다. 1장에서는 약간의 거리, 그 사잇길로 접어들어 사람과 세상으로부터 받은 감동과 웃음을 전한다. 특히 보이스피싱을 당한 이야기인 「그녀 목소리」를 읽으면 세상을 향한 저자의 순하고 여린 마음을 엿볼 수 있다. 2장은 사랑과 예술 이야기로, 사랑하는 아버지와 동생을 떠나보내고 남겨진 자의 심정을 뭉클하게 풀어냈다. 꿈속에서나마 돌아가신 아버지와 춤을 추고 싶은 마음, 죽은 동생이 남긴 핸드폰을 버리지 못하고 그 속에 담긴 음악을 듣곤 한다는 이야기, 이제 세상에 가족이라곤 한 분밖에 남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마음, 보신탕으로 팔려가는 개를 사서 키운 슬픈 사연 등 작가의 성격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파트다. [플라이 투 더 문] [돈 워리 비 해피] 등 음악에 자신의 아픈 심사를 얹어 읽는 사람이 더욱 깊이 공감하게 한다. 3장은 추억과 단상에 대한 이야기다. 다섯 살 무렵 살았던 광화문 내수동의 막다른 골목 큰 대문집 다다미방부터 자유의여신상이 보이던 뉴욕 월드트레이드 센터 근처 작업실, 어머니가 직접 설계한 건물의 작업실까지, 작가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었던 작업실에 대한 추억과 한국전쟁 당시 형 대신 병사로 나갔다가 실종된 얼굴도 모르는 삼촌 이야기 등, 하루하루 살며 떠오른 단상과 그립고 안타까운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이가 들자 건망증이 심해져서 “고마운 사람도 다 잊어버릴까 봐 그게 문제”(145쪽)라는 구절에 이르면, 나이 들며 느끼는 안타까움과 쓸쓸함이 뭉근하게 피어오른다. 4장은 저자가 사랑한 세상, 아프리카 탄자니아부터 남미의 볼리비아 포토시까지, 동유럽 사라예보에서 아시아 마카오까지 전 세계에 찍힌 발자국의 기록이다. 전 세계 수많은 나라를 다니며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적고 그린 내용이다. 카프카의 도시 프라하가 변해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지금은 그리스 산토리니에 가도 예전처럼 전통의상을 입은 할머니들을 만날 수 없다는 이야기, 스리랑카에서 만난 마음 따뜻한 사람들에 대한 추억 등, 현실에 순응하거나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과 미소를 만날 수 있다. 지면을 통해 잠시나마 전 세계 여행을 함께한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예스24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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