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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환의 시간여행] [138] '性생활용품점' 문 열자 '철거 결의대회' "양갓집 규수들 타락시킬 물건" 비난도

바람아님 2018. 11. 29. 05:17

조선일보 2018.11.28. 03:12

 

1996년 5월 14일 서울 이대입구역 부근에 26㎡(약 8평) 규모의 가게 하나가 개업했다는 소식이 거의 모든 신문에 보도됐다. 서울에 최초로 등장한 '성인용품점' 이른바 '섹스숍'이었다. 진열대엔 남성용 피임 기구와 자위 기구, 성인용 비디오 등 그간 뒷골목에서 팔리던 90여종의 물건을 한데 모았다. 해외여행 때 이런 종류의 가게를 좀 들러본 사람들은 서울의 첫 섹스숍을 '유치한 수준이군!'이라고 평했다. 남근 모양의 여성용 자위 기구처럼 법률상 금지된, '수위(水位)가 높은' 물건들은 없었기 때문이다. 개업 이튿날엔 경찰이 찾아와 가게 전부를 꼼꼼히 들여다봤다. 하지만 명백한 위법 사실은 못 찾아냈다. 그래도 성생활용품만을 한데 모아놓고 판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은 만만치 않았다.

1996년 5월 서울 도심에 최초로 문 연 성생활용품점을 보도한 기사. 사진은 점원이 남성용 피임 기구 모양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 가게의 업주는 그해 12월 구속됐다(조선일보 1996년 5월 16일자).

1980년대부터 성생활용품들의 밀수가 잦아지자 검찰은 '국민 윤리 기강 문란'이라며 철퇴를 내려왔다. 신문 사설에선 이런 기구를 파는 사람을 '패륜 망국 사범'이라고 꾸짖었다. 관련 사건을 맡았던 어느 검사는 "양갓집 규수들을 타락시키거나 가정 파괴 등의 범죄에 악용될 수 있다"는 표현까지 썼다(경향신문 1988년 10월 28일자). 1996년 문 연 성인용품 전문점도 아무리 법률의 테두리 안에서 영업했다지만 상당수 시민들의 비난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전북에선 학부모 100여명이 성인용품점으로 몰려가 철거를 촉구하는 결의대회까지 열었다.


마침내 성생활용품점 등장 두 달 만에 경찰이 단속의 칼을 뽑았다. 문제는 이런 가게를 명백히 금지하는 법률이 없다는 데 있었다. 풍기문란 문제 때문에 수사에 착수했으면서도 검찰은 약사법 위반을 문제 삼아 구속영장을 청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영장이 기각됐다. 그러자 검찰은 다시 음반·비디오에 관한 법률, 심지어 관세법 위반으로까지 업주를 구속하려 했지만 세 차례 신청한 영장이 모두 기각됐다. 법원은 "성(性) 보조 기구가 풍속을 해칠 우려가 있는지에 대한 소명이 부족하다"고 밝혔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은 검찰이 1996년 12월 성인용품점 업주에 대해 네 번째로 청구한 영장이 결국 발부됐다. 가맹점 업주들에게 근거 없이 '로열티 비용'을 받아낸 죄(사기)로 청구했으니 일종의 '별건 수사'였다.


'성공한 아이디어 맨'으로 신문과 TV에 크게 소개됐던 국내 1호 섹스숍 창업자는 몇 달 영업해 보지도 못하고 구속됐다. 그러나 성인용품 판매 자체에 대한 단죄가 내려진 건 아니었기에 다른 성인용품점은 폭발적으로 늘어갔다. 1997년 1월 전국엔 이런 가게가 200곳을 넘어섰다(경향신문 1997년 1월 21일자).


이젠 성생활용품점이 대도시 번화가마다 자리잡는다. 홍대 앞에만 10곳이 넘는다. 서울 명동 한복판엔 3개 층 외벽을 핑크빛으로 칠한 성인용품 매장이 영업 중이다. 지난 21일에는 이 분야의 세계적 업체라는 일본 기업 대표가 '기자 간담회'까지 열고 내년 중 자사의 성인용품점을 한국에 상륙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이 회사의 자위 기구는 서울 어느 최고급 호텔 객실에도 비치됐다. 불과 20여년 만에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변하고 있는 한국의 성 풍속이다.


김명환 前 조선일보사 사료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