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12.19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1991년 7월 17일 이성주·김형곤 학예사와 박문수 연구원 등 창원대박물관 조사단은 울산 중산리(현 중산동)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아파트 터파기 공사 중 고분군(古墳群)이 훼손됐기에 긴급 발굴에 나선 것이다. 현장은 참혹했다.
터파기를 하면서 잘려나간 무덤 잔해가 수두룩했다. 조사원들은 충격을 받았지만 남아 있는 무덤이라도 조사하기로 했다.
첫날부터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겉흙을 제거하자 훼손되지 않은 무덤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드러났다.
어떤 무덤에선 쇠로 만든 갑옷과 투구가, 또 어떤 무덤에선 길쭉한 쇠창이 마치 철도 레일처럼 바닥에 쫙 깔려 출토됐다.
오리모양토기, 중산리ID-15호묘, 창원대박물관.
발굴 기한 연장은 불가피했다. 게다가 발굴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변에서 또 다른 공사가 벌어지면서 그곳까지
발굴하게 되었다. 차수를 달리하며 이어진 발굴이 모두 끝난 것은 1993년 5월의 일이다.
그 사이 조사된 무덤은 970여기에 달했고 출토 유물은 1만점을 넘어섰다.
경주 시내에 주로 분포해 신라 왕경인(王京人)의 묘로 알려진 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뿐만 아니라 목곽묘, 석곽묘,
석실묘 등 다양한 종류의 무덤이 망라됐다.
출토된 유물은 경주 시내에서 발굴된 것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처럼 닮았다.
토기 중에서는 장송 의례용으로 추정되는 오리 모양 토기가 3점이나 출토돼 눈길을 끌었다.
중산리 고분군은 일약 '신라 고분 연구의 보고(寶庫)'로 떠올랐다.
출토 유물을 모두 정리하기까지 20여년이 걸렸다.
그 작업을 주도한 김 학예사는 중산리 고분군의 규모가 이토록 큰 이유를 신라의 철광산 운영에서 찾았다.
중산리에 살던 사람들이 오랫동안 인근 달천광산(達川鑛山)의 철을 캐내고 제련하는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실제 중산리 고분군 인근에서 제련용 숯을 굽던 가마, 제련 관련 시설이 근래 속속 발굴되고 있어
중산리 고분군을 둘러싼 베일이 조금씩 걷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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