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때는 물론 대학교 때도 무슨 과목이든지 항상 첫 수업의 주제는 ‘○○은 무엇인가’라는 정의 내리기였던 것이 기억난다. 철학을 들으면 철학의 정의, 경제학을 들으면 경제의 정의, 정치학을 들으면 정치의 정의부터 배우는 것이 상례다. 그 과목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않으면 그 과목의 의미는 물론 효용 가치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든 것은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의 미국 방문을 보면서 미국과 북한이 비핵화에 대해 다른 정의를 고수 중이라는 느낌을 받은 탓이다.
지난해 11월 8일로 예정됐던 고위급 회담을 연기했던 김 부위원장은 17∼19일 워싱턴 DC를 찾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부 장관과 잇달아 만났지만, 회담 후 흐름을 보면 회담이 비핵화 대 제재 완화라는 ‘빅 딜’에서는 진전이 없었다. 백악관은 회담 직후 “미국은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FVD)를 볼 때까지 제재와 압박을 지속할 것”이라고 발표했고, 북한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김 부위원장과 북한 대표단은 숙소인 듀폰서클호텔을 떠날 때 회담 성과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회피했다.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와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이 21일 스웨덴에서 사흘 간의 실무협상을 마쳤지만, 비핵화에 대한 양국의 정의가 다른 상황에서 ‘빅 딜’을 이뤘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미국과 국제사회의 비핵화는 북한이 가지고 있는 핵무기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폐기를 의미한다. 현재 북한이 보유한 핵무기는 물론 미래의 핵 능력까지 폐기하라는 것이다. 반면 북한은 비핵화란 한국에 대한 핵우산 철폐를 포함한다며 주한 미군은 물론 태평양 지역에 배치된 미군까지 겨냥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20일 조선중앙통신은 ‘조선반도 비핵화’에 대해 “우리의 핵 억제력을 없애는 것이기 전에 조선에 대한 미국의 핵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제대로 된 정의”라고 밝혔다. 비핵화 정의 차이는 북핵 폐기를 위한 비핵화 협상을 핵 군축 협상으로 전환하려는 북한의 대응으로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미 전문가들은 북한이 자신들의 비핵화 정의를 밀어붙일 경우 2차 미·북 정상회담이 핵 동결이나 대륙간탄도미사일(IBM) 폐기 대 일부 제재 완화나 핵우산 폐기라는 ‘스몰 딜’로 마무리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러시아스캔들(2016년 미 대선 러시아 개입) 등으로 정치적 위기 상황인 트럼프 대통령이 돌파구를 찾기 위해 북한의 비핵화 정의를 수용해 핵 폐기가 아닌 핵 군축으로 방향을 틀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북한은 사실상 핵보유국이 되고 한국은 북핵이라는 폭탄을 안고 살아야 한다. 문제는 한국이 이런 위기상황에도 북한이 주장하는 비핵화 정의에 눈을 감고 있다는 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비핵화와 국제사회의 비핵화에는 차이가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미·북 비핵화 협상 중재는 한국민의 안전을 확보하는 중재가 돼야지 미국과 북한 중간에 어설프게 서 있는 자세여서는 안 된다. 이런 식의 중재는 동맹에는 불신을, 적에게는 무시를 당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su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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