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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옥의 말과 글] [89] 당하지 않겠다

바람아님 2019. 3. 9. 19:54

(조선일보 2019.03.09 백영옥 소설가)


백영옥 소설가백영옥 소설가


20대 조카에게 '왜 호갱 노릇하느냐'고 핀잔을 당한 적이 있다.

내가 정보를 너무 모른다는 것이 그녀의 말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는 조카는 스마트폰에 온갖 앱을 장착하고 '절대 속지 않으리~'를

모토로 사는 사람처럼 '최저가'와 '가성비'를 넘어 '가심비'까지 챙겼다.

항공료와 호텔비도 늘 나보다 싸게 예매했고, 화장품은 브랜드 이름만 쳐도 유해 성분과

알레르기 성분을 분석해주는 앱을 이용했다.

집을 구할 땐 허위 매물과 호가가 잡초처럼 무성한 부동산 사이트가 아니라 실제 매물 가격이 나와 있는 앱을 사용했다.

조카의 말을 듣다가 '신뢰의 비용'에 대해 생각했다.

서로가 믿지 못해서 생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경제적 심리적 비용들 말이다.

신뢰가 없어서 수없이 거쳐야 하는 실무 절차는 물론이고, 내신과 학종에 대한 불신이 만들어내는 갈등과

치솟는 사교육비 역시 신뢰 비용이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채용 비리는 어떤가.


'우리 반 15등 김유진'이라는 다큐멘터리는 1990년대생 중 가장 많은 이름으로 등록된 '유진'이라는 이름의 대표성으로

시작한다. 다큐에는 다양한 공시생들이 등장하는데, 내게 가장 인상적인 말은 자신이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는 건

공시가 유일하게 지방대생이라는 편견과 학력이 작동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라는 말이었다.

'90년생이 온다'의 저자 임홍택 역시 90년대생들의 가장 큰 특징을 딱 하나만 꼽는다면 '당하지 않겠다!'라는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공무원 시험 합격률은 2%다.

100명이 도전해 98명이 떨어지는 시험에 온 청춘이 매달리는 건 엄청난 국가적 손실이다(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공시생 양산에 따른 경제적 손실은 연간 17조원이 넘는다). 하지만 20·30대가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는 건

단지 '직업 안정성' 때문만은 아니다. 정직함이나 공정함에 1990년생의 감각이 이전 세대와 다르다면

우리 사회가 더 이상 그것을 무시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