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3.08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1590년 일본을 다녀온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해
엇갈리는 보고를 한다. 외침(外侵)을 경계한 황윤길은 옳았고
일본의 허세로 치부한 김성일은 틀렸는가?
결과만 놓고 보면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의 결론이 아니라
결론에 도달한 과정이다.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중국을 복속시키겠다는 '당국평정(唐國平定)'을
호언하고 있었다. 류큐와 조선을 먼저 입조(入朝)시키고 저항하면 칠 것이라는
소문이 규슈 일대에 쫙 퍼져 있었다. 소문은 사절의 귀에도 들어갔다.
귀를 의심케 하는 이 불온한 소문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이때 중요한 존재가 쓰시마의 소(宗)씨였다. 그들은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필사적으로 살길을 찾아야 하는
변경(邊境)인들이다.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며 조선의 환심을 구하던 소씨였지만 히데요시 치하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히데요시는 소씨에게 조선의 입조 동의를 받아오라는 명을 내린 터였다. 포상의 유혹과 처벌의 엄포가 수반되었다.
생사의 기로에 선 소씨는 일본을 선택한다.
조선 사절을 맞이하는 예를 격하하고 거리를 둔 것은 그러한 의중이 반영된 신호였다.
사절들은 소씨의 무례에 노발대발하면서도 그 이상의 행간(行間)을 읽지 못했다.
서양과 교류를 시작한 일본은 전례 없는 전력 상승과 대외 인식 변화의 와중에 있었다. 통신사들의 보고는
막연한 인물평이나 주관적 추측에 근거할 뿐, 어느 쪽도 정세를 꿰뚫어보는 통찰과 입체적 분석이 없었다.
무엇보다 소씨를 휴민트(HUMINT)로 포섭하는 전략적 감각이 있었다면 일본 사정에 깊숙이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나,
조선은 소씨를 왜구의 후예라 무시할 뿐 가까이 두려 하지 않았다.
훗날 선조가 황윤길의 간언을 듣지 않은 것을 통한으로 여겼다고 하나
애초부터 피상적 관찰이나 희망적 사고에 불과한 보고를 듣고 제대로 된 판단을 할 도리는 없었다.
이것이 시대를 초월하는 임진왜란 전야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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