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3.25 윤희숙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요즘 재정 원칙들 빠르게 와해… 추경 만성화 등 비정상의 극치
재정 규율 이렇게 무너지는데 견제 목소리 없는 게 더 큰 걱정
윤희숙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2020년 예산안 편성 지침이 이번 주 26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될 전망이다.
편성 지침은 정부의 현실 인식과 편성 기본 방향을 밝히며 예산 사이클의 시작을 알린다.
이번 예산 편성은 그다지 반갑지 않은 이유에서 중요하다.
재정전문가가 아니라도 감지할 수 있듯, 그간 보수 정부와 진보 정부를 막론하고 국가 운영의
기본 원리로 준수해온 재정 원칙이 지금 빠르게 와해되고 있다. 연이은 총선, 대선과 얽힌
내년의 예산이 이러한 추세를 가속화시킬 것인지,
최소한의 고삐 잡기를 해낼 것인지에 따라 중요한 분기점이 형성될 것이다.
국가 재정의 대원칙, 재정 수지를 건강하게 유지하고 일단 거둬들인 돈은 명확한 목표하에 최대한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는 금칙은 요즘 무시되기 일쑤다.
소득수준과 상관없이 전체 가구에 동일한 현금액을 지급하는 아동수당은 연간 2조원을 훌쩍 넘는 재원이 들지만,
도대체 정책 목표가 뭐냐는 질문에 뚜렷한 대답조차 없이 여야 합의로 실시됐다.
지원금에 관심 없는 이들까지 정부지원금을 받아가게 하는 신청 독려 업무 때문에 담당 인력이 힘들어 죽겠다는
일자리 안정자금은 누구에게 갔는지 어떤 효과가 있었는지 점검조차 않는다. 공공일자리 양산은 국민이 피땀 흘려
창출한 부를 걷어 훨씬 부가가치가 낮은 일에 붓는 것이기 때문에 비상상황에나 동원해야 함에도, 일자리 수 채우기의
주요 수단으로 자리 잡아 확대일로다. 총선용이라 의심되는 토건 프로젝트는 사상 최대 예타 면제를 통해 공식화됐다.
이 속에서도 단연 정점은 추경의 만성화다. 미세 먼지나 실업이 불과 석 달 전 예산 통과 때 예상치 못한 문제가 아닐진대
재정 당국이 지금 스스럼없이 추경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것은 어떤 각도에서 봐도 정상이 아니다.
그런데 더 큰 걱정거리는 이렇게 재정 규율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데도 견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덕분에 예전 같으면 치열한 논쟁 속에 원래의 조악한 계획이 수정되고 개선됐어야 하는 사안들이 모두 초고속 논스톱으로
처리됐다. 물론 정권이 바뀌면 언제나 그 정권과 결이 같은 목소리가 더 힘을 얻는다. 아직 재정 여력이 충분하며,
불평등 완화를 위해 확장적 지출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진 것은 어느 정도 자연스러우며 일리도 있다.
시류와 코드를 좇는 철새들도 언제나 존재해왔다. 진짜 문제는 이러한 주장과 부딪쳐 마찰열을 내면서 더 나은 방향을
찾아야 할 반대 담론이 자취를 감췄다는 것이다.
지금의 재정 여력이 고령화와 함께 빠르게 소진돼 지금 재정이 불안한 선진국보다 조만간 더 악화될 것이라는 점,
지금의 재정 지출이 지나치게 소모성이라 불평등 완화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점들에 대해 확장론자는 물론이고
재정 보수론자까지도 침묵하고 있다. 더 말해봤자 바뀔 게 없다는 학계와 언론의 냉소주의는 패배주의의 다른
얼굴인데 사실 규율을 허무는 정부만큼이나 큰 파괴력을 갖는다.
비정상이 정상처럼 인식되는 데 일조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경종을 울린 것은 보다 못한 은퇴 관료들이 나서서 주목받지 못할 게 뻔한 호소문을 발표한 사건이다.
지난 20일 경제 부처 전직 장·차관과 언론인이 주축인 건전재정포럼은 '2020년 정부 예산 편성 지침 수립에 즈음하여'라는
성명서를 주요 기관과 언론사에 배포했다. 정무적 판단보다 기본에 충실하라는, 후배 관료들에 대한 따끔한 일침이다.
단순 실업 대책으로 공공일자리를 확대하고 토건 포퓰리즘에 의존해 경제 체질을 악화시키는 오류, 국민과 기업의 역량을
높이는 투자보다 휘발성 지출에 집중하는 단견, 장기 재정 상황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고 재정 운영의 근거로 삼아야 함에도
이를 도외시하는 무책임 등 너무 지당해서 진부하기까지 한 지적들이다. 그러나 근래 대놓고 헌신짝 취급을 받아온
원칙들이기에 비정상에 익숙해진 세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새삼 깨닫는다.
무엇보다 한참 활동해야 할 현직들의 침묵과 현실 외면을 부끄럽게 하는 꾸지람이다.
재정 규율은 남의 돈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신중함이며, 지출을 늘리고 싶은 건 모든 정부가 마찬가지니
스스로를 예외 취급하지 말라는 원칙이다. 이것이 무너질 때 너도나도 공돈 나누기에만 몰두하는 사회가 된다.
예전 우리가 딱하게 여기던 사회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것이 바로 우리 모습이 아닌지, 우리가 되고자 하는
모습이 과연 이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목소리를 내야 할 때다.
2020년 예산은 그 고민이 담겨야 한다.
'時事論壇 > 핫 이슈' 카테고리의 다른 글
<美國에서 본 한반도>실패한 혁명은 혁명 아니다 (0) | 2019.03.28 |
---|---|
“동맹을 거래로 본 트럼프, 진보적 대북관 문 대통령과 마찰”,위기의 한국 외교 <상> (0) | 2019.03.26 |
[류근일 칼럼] 이제는 끝장을 내자 (0) | 2019.03.20 |
[전영기의 시시각각] 최장집의 '관제 민족주의' 경고 (0) | 2019.03.19 |
[신세돈칼럼] 한국 제조업의 엑소더스, 원인 무엇인가 (0) | 2019.03.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