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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魚友야담] 켄타우로스의 허리를 둘로 가른다면

바람아님 2019. 4. 21. 06:54

(조선일보 2019.04.20 어수웅·주말뉴스부장)
 

[아무튼, 주말- 魚友야담]

켄타우로스의 허리를 둘로 가른다면


어수웅 주말뉴스부장어수웅 주말뉴스부장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 녀석 학교에 희귀한 선생님이 있습니다. 수학과 역사를 함께 가르친다는군요.

가령 2학년 1, 2, 3반에서는 역사를 가르치고 4, 5반에서는 수학을 강의하는 식입니다.

고구려 연개소문과 인수분해를 동시에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니. 도대체 가능할까 싶기도 한데,

학생들에게는 양쪽 모두 인기라고 하네요.

선생님 마음속의 수학과 역사는 어떻게 다투고 어떻게 화해하는 걸까요.


이번 주 읽은 책 중에 '프리모 레비의 말'(마음산책 刊)이 있습니다.

레비(1919~1987)는 '증언 문학'의 대표 작가. 이탈리아계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였죠.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자신의 의무는 '살아남은 자의 증언'이었습니다.

그 역시 두 자아의 소유자. 토리노대학 화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화학자 레비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뒤

회고록과 소설을 쓰는 레비입니다.

대표작은 '이것이 인간인가'와 '주기율표'. 주기율표를 외우는 소설가를 상상합니다.

반인반마(半人半馬), 아니 상반신은 문학이고 하반신은 화학의 몸뚱이를 가진 켄타우로스.


인간의 이해가 점점 더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은 지면에 담아내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이야기지만 분명한 건 있습니다. 이분법은 답이 아니라는 것.

주지하다시피 켄타우로스는 그리스 신화 속 상상의 존재. 사람과 말의 혼종이죠. 둘만이겠습니까.

내 안에는 내가 너무도 많죠. 그런데도 일도양단(一刀兩斷)의 이분법으로 사람을, 타인을 재단할 수 있는 걸까요.


이번 주 화제가 됐던 글로 문학평론가 김병익 '인간 이해의 착잡함'이 있습니다.

친일파 이완용이 소재였죠.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손병희 선생이 친일파의 거두(巨頭)에게 이번에는

매국(賣國) 말고 흥국(興國)하자며 3·1운동 동참을 제안합니다.

이완용은 사양하지만, 일본 경찰에 밀고도 하지 않고 거사 자체를 비밀에 부치죠.

이완용을 구원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일화이지만, 분명한 게 있습니다.

'친일파'나 '빨갱이'라는 낙인은 너무나 납작하고 안일한 판단이라는 것.


다시 레비의 말을 생각합니다.

"괴물들이 있기는 한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위험한 존재가 되기에는 그 수가 너무나 적다.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평범한 인간들이다.

의문을 품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믿고 행동하는 기계적 인간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