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설왕설래] 지하 만리장성

바람아님 2019. 5. 31. 05:07
세계일보 2019.05.29. 21:49
‘강대한 조국이여/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곳/ 모든 곳이 평화와 햇볕으로 가득하네….’ 중국 영화 ‘상감령’의 주제가인 ‘나의 조국’이다. 미군을 승냥이와 이리떼로 비하한 노래다. 2011년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의 미국 방문 때 중국 피아니스트 랑랑이 백악관에서 이 곡을 연주해 논란을 빚었다. 그 의도를 놓고 뒷말이 많았다.
        

중국은 그들이 항미원조전쟁이라 부르는 6·25 전쟁의 최대 전과로 상감령 전투를 꼽는다. 1952년 10월14일부터 42일간 강원도 철원 상감령 양쪽의 저격능선과 삼각고지에서 미군 7사단, 국군 2·9사단이 중국군 15군과 벌인 혈전이다. 중국군은 유엔군의 압도적인 화력을 견뎌내며 상감령과 위쪽 오성산을 사수했다. 일등공신은 ‘지하 만리장성’으로 불렸던 갱도 요새였다.

유엔군의 폭격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1951년 8월부터 갱도 구축에 나섰다. 방공, 방호, 방독, 방수, 방화, 방습, 방한의 7방이 공사의 원칙이었다. 발파 폭약은 유엔군의 불발탄으로 만들고 철공소까지 세워 삽과 곡괭이를 제작했다. 낮에 흙을 파 동굴 입구까지 옮긴 뒤 밤에 산기슭으로 옮기는 방법으로 관측을 피했다고 한다.


총길이 287㎞에 이르는 9519개의 통로와 총길이 3683㎞에 이르는 78만4600개의 참호가 만들어졌다. 폭탄 대피소와 지휘소·관측소·토치카는 10만1500개나 됐다. 서해안과 동해안을 연결하는 폭 20~30㎞의 거대한 개미집이 만들어진 형상이었다. 규모면에서 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의 마지노선을 능가했다. 지하 갱도전술은 북한군 땅굴의 모태가 됐다. 베트남전 때도 호찌민에게 차용돼 한국군과 미군을 괴롭혔다.


미국과 무역전쟁 중인 중국이 영화 ‘상감령’을 방영하며 대미 항전 의지를 다지고 있다. 런정페이 화웨이 회장도 상감령 정신을 입에 올렸다. “미국 정부의 극한 압력에도 화웨이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며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고 했다. 경제·군사적 격차가 아직은 비교불가인데도 중국은 기죽지 않고 큰소리친다. 미국과 힘이 대등해지면 얼마나 세계를 흔들어 놓을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김환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