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6.16. 13:40
'적폐청산'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직권남용죄
"文정권 발목 잡을 것"⋯대통령도 고소당해
법조계 "법적 혼란 막으려면 기준 재정비해야"
이명박·박근혜 정권 관련 각종 정치 사건과 양승태 사법부의 행정권 남용 의혹 등 현 정권의 이른바 ‘적폐 청산’ 과정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쓰였던 직권남용죄를 두고, 법조계에서는 "결국 문재인 정권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말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관측이 현실이 되듯, 현 정부 인사들에 대한 직권남용 논란은 수시로 불거졌다. 최근엔 문 대통령이 이 혐의로 고소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곽 의원은 "문 대통령이 특정 사건에 대해 수사를 지시한 것은 법령상 근거가 없기 때문에 직권남용과 강요에 해당한다"고 했다. 앞서 문 대통령은 지난 3월 18일 김부겸 당시 행정안전부 장관과 박상기 법무부 장관으로부터 ‘김학의 사건’ 보고를 받고 "사건 실체와 제기되는 의혹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낱낱이 규명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다음날 대검 과거사 진상조사단의 이규원 검사는 수사권고 초안 작성에 들어갔고, 이 초안을 바탕으로 법무부 산하 검찰과거사위원회가 수사권고 결정을 내렸다는 게 곽 의원 측 설명이다.
과거사위의 수사권고 이후 대검은 수사단을 꾸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을 둘러싼 각종 의혹을 수사했지만 곽 의원 관련 의혹은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앞서 과거사위는 곽 의원이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3년 민정수석으로 있으면서 당시 김 전 차관에 대한 경찰 수사에 부당하게 개입했다며 대검에 수사외압 수사를 촉구했다. 그러나 검찰 수사단은 "당시 수사를 맡았던 실무자들을 조사했지만 다들 ‘부당한 지시를 들은 바 없고, 하고 싶은 만큼 수사를 다했다’고 해서 혐의를 확인할 수 없었다"고 했다. 또 "일부 수사외압을 주장한 관계자가 있었지만 직접 보고 들은 게 아니라 ‘느꼈다’, ‘생각했다’ 식으로 진술해 법적으로 평가할 수 없었다"고 했다.
형법 제123조의 직권남용죄는 공무원이 자신의 권한을 넘어서, 누군가에게 의무 없는 일을 행하게 하거나 권리행사를 방해하는 범죄다. 이 범죄가 성립하기 위해선 공무상 권한에 포함되는 행위여야 하고, 권한을 남용해, 산하 관청이나 부하 공무원 등에 의무가 아닌 일을 시켜야 한다. 혐의가 인정되면 5년 이하의 징역과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고 있다.
법조계에선 법조문상 ‘직권’ ‘남용’ ‘의무’ 등 단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해 법적 명확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 판사들도 판례가 부족해 판단하기 어려운 범죄라고 말한다. 그만큼 혐의 입증이 어려운 범죄로 분류돼 왔다. 특히 대통령과 국회의원 등 선출직, 정무직 공무원의 경우 그 직무범위가 포괄적이고, 권한 경계가 모호해서 기소까지 이뤄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현 정부 출범 후 ‘직권남용’ 고소·고발 급증
2017년 9700여건, 지난해엔 1만4300여건
판결 오락가락...현 정부 인사들은 기소도 안해
16일 대검찰에 따르면 직권남용 관련 고소·고발 건수는 지난 2017년 9741건, 지난해 1만4345건 등으로 현 정권 출범 이후 급격히 늘고 있다. 그 이전에는 매년 5000~6000건 수준이었다. 검사장 출신 변호사는 "직권남용죄는 입증이 어려운 범죄라 실제 기소되거나 처벌받는 사례가 드물었는데. 국정농단, 적폐청산 과정에서는 단골 메뉴가 되고 있다"며 "그러나 사실 판단 기준이 모호해서 논란을 부를 소지가 많다"고 했다.
실제 재판에서나 법조계 판단은 엇갈리고 있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기업들이 보수단체를 지원하도록 한 이른바 ‘화이트리스트’ 사건 1심에서 이 같은 지원 요청이 대통령 비서실장의 일반적 직무권한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2심은 직무권한에 속한다며 정반대 결론을 냈다. 특정 성향의 판사들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주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재판에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과 관련해서도 법조계 의견은 분분하다. 검찰 측에선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 등에게 소속 법관에 대해 점검하고 감독할 수 있는 '직무감독권'을 가진다고 보지만,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측에선 사법부 내 법관의 독립을 해칠 '상하관계'가 없고, 자신들에게 재판 관련 직무상 명령권이 없기 때문에 직권남용죄 법리적용이 잘못됐다는 입장이다.
현 정권을 겨냥한 직권남용죄 관련 수사는 여러 차례 착수된 바 있지만 대부분 수사 단계에서 '혐의 없음'으로 결론났다. 법원 판단을 받아보지도 못했다. 청와대 특별감찰반의 민간인 사찰 의혹과 관련해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이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당한 바 있고, 백운기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등은 정부의 원자력 발전소 폐쇄 정책과 관련해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당했지만 모두 '불기소 처분'이 내려졌다. 또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는 KT&G 사장 인사개입과 국채 발행 강요 의혹과 관련해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당했지만 무혐의 처분됐다.
청와대 특별감찰반 출신 김태우 전 검찰 수사관의 폭로로 불거진 이른바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은 현재 법원에서 심리중이다. 검찰은 지난 4월 직권남용 등 혐의로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과 신미숙 전 청와대 균형인사비서관을 불구속 기소했다. 환경부 산하기관 임원 자리에 친(親)정부 성향 인사를 앉히기 위해 부하 직원들에게 의무없는 일을 시켰다는 것이다. 다만 이 사건이 불거지고 청와대 윗선 개입에 대한 의혹이 있었지만 검찰은 ‘연결고리’를 찾지 못했다며 조현옥 청와대 인사수석 등 상급자에 대한 조사도 하지 않은 채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법조계에서는 이처럼 직권남용죄 사건이 대폭 늘어나고 검찰, 법원의 판단에도 법적 논란이 끊이질 않는 데 대해 명확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이번 정권 들어 ‘적폐 청산’이란 이름으로 직권남용죄가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남용된 경향이 있다"며 "애초부터 명령과 지시가 오가는 관계가 안 된다거나, 일상적인 업무로 볼 수 있는 현상까지도 직권남용이라고 하니 안 걸리고 남아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했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국정 운영에서의 순수한 정책적 판단인데도 정치적 논란이 될 경우 정쟁에 악용될 위험성이 크다"며 "사익을 추구한 것이 명확한 경우만 처벌 대상으로 삼는 등 법의 적용 범위를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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